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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희운 Dec 18. 2021

침범 불가한 삶의 영역

<파워 오브 도그> 단평

※ <파워 오브 도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피아노>로 국내 관객들에게 익숙한 이름인 제인 캠피온 감독이 다루는 서부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파워 오브 도그>에서 제인 캠피온 감독은 남성들의 세계로 치부되어왔던 서부극이라는 배경에서 인물들 간의 섬세한 감정 변화를 밀도 깊게 관찰하며 기존의 서부극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거대한 목장을 운영하면서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필, 그러한 필 옆에서 순응하면서 살아온 조지. 조지는 필 옆에서 항상 그의 의견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느 날 조지가 한 마을에서 과부 로즈를 만나 결혼하면서 이들의 삶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필은 자신의 집으로 들어온 로즈를 적대적으로 대하고, 로즈는 이러한 필의 행동에 심리적인 압박을 느끼며 조금씩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한다. 필은 로즈의 아들인 피터까지 조롱하면서 로즈와 피터를 집안에서 편히 있지 못하게 만든다. 


영화 속에서 필의 겉모습은 전형적인 마초에 가깝다.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목장에서 그는 모든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며 그 누구라도 자신의 말에 거스르는 것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필은 항상 자신의 옆에서 자신이 조롱하는 말을 군말 없이 들어왔던 조지가 자신의 뜻을 어기고 로즈와 결혼하기로 했을 때, 이에 엄청난 분노를 느낀다. 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영역 내에서 무언가 어그러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데, 그에게는 자신이 통치하는 영역 자체가 곧 그의 정체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필은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목장을 관리하며 자신 만의 완벽한 세계를 만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가 만든 세계는 무언가를 감추기 위한 세계에 가깝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닌 들판 위의 거대한 산을 바라보며 사는 필은 무언가를 하더라도 항상 브롱코 헨리라는 인물의 이름을 언급한다. 표면적으로 브롱코 헨리는 필에게 가장 절친했던 친구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브롱코 헨리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숨겨져 있었다. 유약해 보이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위해 필은 남성적인 모습으로 겉을 무장해온 것이다. 하지만 마음에 남아있는 브롱코 헨리에 대한 감정의 해소를 위해 필은 자신 외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비밀 공간을 만들어놓는다. 그곳은 아무도 들어올 수 없고, 오로지 필만이 헤엄치고 쉼을 누릴 수 있는 성역이다. 공간 한쪽에는 그의 은밀한 취향들이 숨겨져 있는데, 이러한 은밀한 취향을 로즈의 아들 피터가 처음으로 발견하게 된다.


필에게 있어서 로즈의 아들 피터는 처음에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지만, 갈수록 신경 쓰이게 만드는 존재로 변모한다. 필이 처음으로 피터를 마주했을 때 그는 중성적인 외모를 갖고 있는 피터에게 적대적으로 대하며 피터가 만들어놓은 종이꽃을 불로 태워버린다. 자신의 남성적인 성향과 완전히 대조되는 피터에게서 필이 느낌 감정은 '불편함'에 가까운데, 그것은 자신이 오랜 시간 동안 억압해왔던 감정에 대한 반동으로 보인다. 자신의 내면 어딘가에서부터 느낀 끌림을 외면하고자 그에게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을 해왔지만 자신도 모르게 갈수록 피터에게 끌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부분이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 바로 피터가 필의 비밀 공간에 들어가는 장면이다. 처음 필의 비밀 공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피터가 그 공간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필의 취향을 발견하는 장면을 통해 필이 남들과 다른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필은 처음으로 누군가 자신의 성역에 들어온 것에 대해 분노하며 피터를 내쫓지만, 이 이후부터 자신도 모르게 피터에게 끌리고 있었던 필의 마음속에는 피터가 큰 공간을 차지하게 된다.


필의 세계로 들어간 피터는 서부극의 세계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캐릭터이다. 분명 남성의 외양을 갖고 있지만 그는 어딘가 모르게 가냘파 보이며 거친 카우보이들과는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섬세하게 종이로 꽃을 만들기도 하고 어머니의 일을 열심히 도와주기도 하지만 사실 필은 이 세계 속에서 가장 잔혹한 면모를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토끼를 잡아 어머니에게 보여드리며 잠시나마 로즈를 기쁘게 하지만 자신의 학교 수업을 위해 그 토끼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부하기도 하고, 필과 함께 떠난 여행에서 발이 다친 토끼를 필이 편하게 보내주라고 하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죽이기도 한다.


피터는 처음부터 자신을 적대적으로 대했던 필을 껄끄러워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자신에게  대해주자 그와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거대한 집에서 필에게 억눌린  꼼짝도 하지 못하고 피폐해져 가는 로즈의 모습을 보고 피터는 무언가를 결심하며 어머니에게 자신이 정리하겠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이 지배하는 세계가 중요한 필처럼 피터도 자신의 영역이 중요한 캐릭터이다. 누군가 자신의 영역을 해칠까  거칠게 방어하는 필과 달리 피터는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영역을 누군가 건드리지 않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필을 경계했지만, 그가 자신에게  대해주자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그를 따른 것이다. 그렇지만 필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계속 해를 끼치자 이를 참지 못하고 자신 만의 방식을 실행한다. 피터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영역은 자신 어머니의 안전이며, 이를 침범당했다고 느끼는 순간 자신 속에 감춰왔던 잔인한 본성을 꺼내 것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필이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온 피터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꼈지만, 이와 반대로 피터는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필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느끼며 그를 자신의 영역에서 영원히 추방시켰다는 점이다. 필에게 피터는 자신도 눈치채지 못했던 감정을 새로이 느끼게 해주는 존재였지만, 피터에게 필은 이 영화의 제목처럼 자신이 사랑하고 지켜온 것을 몰락하게 하는 사악한 존재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어긋난 두 사람의 감정은 결국 한 사람의 파멸이라는 결과로 치닫는다. 영화의 엔딩은 피터가 자신의 방에서 어머니 로즈와 조지가 서로를 껴안는 모습을 쳐다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영화 러닝타임 내내 항상 프레임 속에 갇혀있으며 불안정해 보이던 로즈는 엔딩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의 남편과 안정된 포옹을 나눈다. 이를 지켜보던 피터는 안심한 듯이 창문에서 뒤돌아서는데 이제 피터의 세계에는 어떠한 불청객도 없으며, 그가 지키고 싶어 했던 삶의 영역은 항상 안전하게 지켜질 것이라는 암시를 주며 끝이 난다.


필과 피터가 서로의 영역을 넘어서지 않았다면, 이렇게 비극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사실 이 영화의 엔딩은 비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평화롭게 끝난 것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이 평화를 가져오게 한 인물의 행동이 다른 이의 삶의 영역을 완전히 없애버렸다는 점에서 어떤 면에서는 소름 끼치는 결말이기도 하다. 침범해서는 안될 인물들 간의 삶의 영역, 이를 서부극이라는 형식 내에서 서늘한 감정으로 담아냈다는 점에서 <파워 오브 도그>는 충분히 기억될만한 영화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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