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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희운 Jan 19. 2022

밖이 아닌 안을 향한 비극적인 열망

<패싱> 단평

※ <패싱>의 엔딩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패싱>은 192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하여, 흑인이지만 백인 행세를 하는 삶을 살았던 두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넬라 라슨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서로 다른 두 명의 여성이 우연히 마주치면서 각자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는지 섬세하게 묘사한다.


<패싱>은 어느 날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아이린과 클레어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한 호텔의 카페에서 쉬고 있던 클레어는 낯선 여자가 자신을 계속 쳐다보는 것을 보고 당황하지만, 이내 그 사람이 자신이 이전에 알았던 클레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머리까지 염색하고 거의 백인의 외양에 가까운 클레어의 초대에 못 이겨 아이린은 클레어가 묵고 있는 호텔방으로 들어가지만 그곳에서 흑인을 경멸하는 그의 남편의 모욕적인 언행을 참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후 클레어는 아이린에게 계속해서 연락하지만 그는 클레어의 연락을 무시하고 급기야 클레어는 아이린의 집으로 찾아온다. 클레어는 자기 자신과 잘 지내 달라고 말하고 아이린은 안쓰러운 클레어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클레어와 친밀하게 지내기 시작한다.


영화 초반에는 백인 사회로 편입했으면서 흑인 사회를 열망하는 클레어가 아이러니해 보이고, 자신이 속한 곳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아이린의 모습이 당당해 보인다. 하지만 둘의 이러한 관계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역전된다. 아이린은 의사인 남편을 두고 나름 흑인 사회에서 부유하게 살고 있고 누구보다도 흑인 커뮤니티를 위해 앞장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의 안에는 백인이 되고 싶은 열망이 가득한 사람이다. 이는 영화 초반 장난감 가게와 호텔 카페에서 누군가 자신이 백인 행세하는 것을 알아볼까 봐 전전긍긍하며 주변의 눈치를 보는 그의 모습에서 드러난다. 아이린과 달리 클레어는 자신의 선택에 의해 백인 사회로 편입하였지만, 흑인 사회로 돌아오고 싶다는 열망을 숨기지 않는 인물이다. 단순해 보이지만 강한 그의 열망은 클레어뿐만 아니라 클레어의 남편인 브라이언까지 매료시킨다. 아이린은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클레어를 질투하면서 동시에 그에게 끌린다. 그의 안에는 자신이 흑인이라는 것과 자신이 흑인 커뮤니티를 위해 힘쓰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그의 자부심은 필요할 때 백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자신을 가리기 위한 위장막에 가까웠다. 어떻게 보면 아이린은 백인으로 '패싱'한 것이 아니라 흑인으로서 완벽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패싱'한 것과 다름없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린은 흑인이 살기에 가혹한 미국 사회의 현실을 직면하는데 눈을 돌린다. 아이들에게 흑인이 폭행당한 이야기를 하는 남편을 나무라고, 아이들에게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게 하기 위해 브라질로 이주하려는 남편의 말을 애써 무시한다.


클레어, 아이린은 모두 사회의 암묵적인 강요에 의해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의 그룹에 속한 삶을 살게 된 인물들이다. 아이린은 그 경계에 있던 인물이었지만, 그의 내면 속에 있던 욕망이 진정으로 희망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자명하다. 영화 초반 억압되고 불안정해 보이던 클레어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오히려 자신이 벗어났던 흑인 사회를 자유롭게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린은 자신이 속한 그룹에도 자신이 속하길 바랬던 그룹에도 오도 가도 하지 못한 채 갈수록 불안해 보인다. 아이린의 불안한 감정이 극에 달했을 때, 클레어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서글픈 지점은 아이린 내부를 향해 파고들었던 감정의 골이 향한 곳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가 아닌, 자신과 닮아있는 클레어를 향했다는 지점이다. 영화 말미에서 클레어가 아이린으로 인해 그러한 결말을 맞았는지는 모호하지만, 앞으로 아이린이 자기 자신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기 더더욱 어렵다는 점에서 모두에게 가장 비극적인 결말일 것이다.


있는 그대로 자신의 삶을   없음에도 자신을 그렇게 만든 사회를 향해 감정을 내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과 같은 곳에 속해있는 다른 약한 이를 향하게 되는 . <패싱> 배경은 1920년대의 미국이지만  영화가 당도한 현재 시점에 비단 이것이 과거의 일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흑백 화면 속에서 이들의 피부색 차이는 아무렇지 않게 보이지만 영화 있는 인물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차이인 것처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도 어떤 이유로 인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의 삶이 아닌 다른 누군가 인척 해야만 하는 삶을 사는 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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