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tv [로어: 세상을 향한 함성] 단평
※ [로어: 세상을 향한 함성]의 각 에피소드에 대한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어: 세상을 향한 함성](이하 [로어])는 애플tv의 오리지널 시리즈로 세실리아 아헌 작가의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다. 총 8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작품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이 겪고 있는 여러 문제들에 생각지도 못한 신선한 상상력을 더해 풀어냈다. 각 에피소드들마다 완성도의 차이는 있으나, 길이가 짧은 만큼 가볍게 즐길 수 있으면서도 한 번쯤 되돌아보게 만드는 여운을 남기는 지점들이 존재한다.
에피소드 1. 사라진 여자
완다는 자신이 쓴 자서전으로 성공을 거둬 책의 영화화 논의를 위해 LA 출장을 오게 된다. 하지만 영화화 논의는 자신이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고 그는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어필하나 그의 목소리는 관계자들의 귀에 닿지 않는다. 결국 그의 자서전은 엉뚱하게 VR 형태로 재현되고, 그가 자서전에서 서술한 아버지를 잃었던 끔찍한 기억은 그저 백인들이 즐기기 위한 유흥거리가 되어버린다. 이 에피소드는 백인 사회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지만 그 표현이 닿지 않아 자신의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 드는 흑인의 심정을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것으로 구현해냈다. 엔딩에 다다러서 그는 자신을 알아본 또 다른 흑인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 남들이 지운다고 해서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간다. 에피소드 자체가 짧다 보니 마무리 엔딩이 급작스럽고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느낌이 들지만, 흑인 여성으로서 백인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에피소드이다.
에피소드 2. 사진을 먹은 여자
로빈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자신의 집에서 모시기 위해 어머니의 집으로 찾아간다. 까탈스러운 어머니를 모시는 것에 대해 걱정이 많았던 그는 어머니를 직접 뵌 뒤에도 그 걱정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어머니 집에 있던 짐을 정리하던 중 로빈은 어머니가 갖고 있던 가족 앨범에서 자신의 사진을 발견하고 갑자기 그 사진을 먹어치운다. 로빈이 사진을 먹자 놀랍게도 사진을 찍은 순간의 기억이 로빈 앞에 생생하게 재현된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 사이에서 이미 중년이 되어버린 딸은 이제 자신의 일부인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져간다는 것을 슬퍼한다. 엔딩에서 상황은 그대로이고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로빈이 사진을 먹어치울 때 자신의 기억이 생생하게 재현됨을 느끼는 것을 통해 아무도 기억하는 이가 없어도 자신 안에서 그 기억이 잊히지 않는 이상 자신의 일부는 여전히 존재함을 보여준다. 기억에 대해서 다루면서도 엄마와 딸 간의 관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유대감을 애틋하게 그려낸 작품이기도 하다.
에피소드 3. 선반에 진열된 여자
아름다운 것이 최고라 믿던 아멜리아는 모델일을 하던 중 남편을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에 성공한다. 이대로 그의 이야기는 행복하게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남편이 그를 진열해놓기 위한 선반을 만들어놓으면서 그의 이야기는 새롭게 시작된다. 선반에 자신의 와이프를 화려하게 꾸며놓고 장식해놓은 이 에피소드는 참으로 기괴하다. 매일 화려한 옷과 치장을 하고 남편이 일하는 거실에서 오로지 그의 눈요기로만 존재하는 아멜리아의 모습은 현실 속에서 그저 남편을 빛내주기 위해 서있는 '트로피 와이프'들을 비유적으로 드러낸다. 이 에피소드는 경력 단절 여성에 대한 놀라운 우화로 특히 아멜리아가 선반 위에서 뛰어내리려고 할 때 그 높이가 실제보다 높아 보이는 장면은 수많은 여성들이 남편과 헤어진 뒤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 독립적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에피소드의 끝에 아멜리아가 차린 자신의 브랜드 매장 입구에서 선반 위에 올라간 모습은 다른 이가 올려준 것이 아닌 자신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 올라갔다는 점에서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인상적인 엔딩이다.
에피소드 4. 몸에서 잇자국을 발견한 여자
능력 있는 직원 암비아는 두 번째 출산으로 거의 죽을 뻔 한 뒤 회사에 겨우 복귀한다. 회사일과 육아 사이에서 나름대로의 균형을 잡아보려고 하지만, 회사에서는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직원과의 기싸움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의 성차별적인 모욕을 견뎌야 하고 급작스러운 출장으로 인해 그 대신 육아하는 남편과 엄마가 언제 오나 기다리는 아이의 눈치를 봐야만 한다. 그러던 중 암비아의 몸에서 잇자국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하고 암비아는 급기야 잇자국으로 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만다. 아기를 낳고 일에 다시 복귀하는 워킹맘에 관한 이 이야기는 엄마 역할과 일하는 역할 모두를 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단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엄마의 역할에만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일을 해야만 하는 엄마들이 자신의 죄책감에 점점 함몰되어 가는 것을 잇자국으로 표현한 것이 참으로 탁월하게 느껴진다. 결국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또 다른 자신 즉, 또 다른 워킹맘들이라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서글프게 느껴지는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에피소드 5. 오리에게 잡아먹힌 여자
매일 공원에 나가 전문의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엘리사는 공원에서 한 오리를 만난다. 그 오리가 특별한 점이 있다면 바로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리를 집으로 데려오게 된 엘리사는 보통 남자들과는 다른 오리에게 끌려 오리와 점점 깊은 관계가 되지만, 오리는 엘리사에게 점점 더 파괴적인 행동을 하며 그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이번 에피소드는 여성이 남성에게 어떤 방식으로 가스 라이팅 당하는지 오리라는 존재를 통해 보여준다. 흥미로운 지점은 실제로 오리가 생각보다 난폭한 동물이며, 특히 수컷들 중에서는 자신의 번식을 위해 강제 교미를 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 에피소드는 표면적으로는 오리와 인간의 연애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같아 보여도 실질적으로는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일부 남성들이 여성들을 어떻게 가스라이팅 하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우화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에피소드 6. 자신의 살인 사건을 해결한 여자
남자 친구와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었던 리베카는 홀로 캠핑을 떠나던 도중 살해당한다. 유령이 되어 다시 나타난 그는 형사 두 명을 따라다니며 그들이 자신의 사건을 해결해주길 바라지만 그들이 헛물만 켜고 있자 결국 자신이 직접 사건을 해결하기로 한다. 젊은 남성층에서 번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이유 없는 혐오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모든 에피소드들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고 흡입력이 좋다. 일반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여성 살인 사건에 대한 묘사도 살인 과정 자체를 집중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이미 벌어진 사건 현장을 보여줌으로써 왜 이런 사건이 벌어졌는지를 집중해서 들여다보게 해 준다. 관습적으로 등장하는 남자 형사 두 명을 주인공처럼 내세웠다가 결국 살해당한 여성과 남자 형사 두 명에게 무시당했던 여성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을 보여주며 클리셰를 비트는 것을 보는 재미도 있다. 에피소드에서 등장하는 살인의 이유가 우리나라에서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는 혐오 살인과 닮아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여성들이 많이 공감할 듯한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에피소드 7. 남편을 반품한 여자
아주 오랜 결혼 생활 동안 남편을 돌보기만 하는데 지쳤던 아누는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남편을 반품하기로 결심한다. 규정상 반품은 불가하고 교환만 가능해 아누는 이런저런 다른 남편들을 만나보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그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만다. 그러던 중 자신의 남편이 앞집의 여자에게 팔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모든 신경이 온통 그 둘에게 쏠리게 된다. 오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여성이라면 한 번쯤 생각해봤을 법한 황혼 이혼을 코믹하게 그려낸 에피소드이나, 결혼 생활은 단순히 한 명만의 노력으로는 유지할 수 없고 서로의 노력이 있어야지만 변화할 수 있다는 다소 뻔해 보이는 결말에 도달했다는 점에서 용두사미처럼 느껴진다.
에피소드 8. 말을 사랑한 소녀
갑작스럽게 아버지를 잃은 제인은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무작정 길을 나서려고 한다. 그러다 자신을 말리는 밀리와 함께 길을 떠나 아버지를 죽인 남자의 뒤를 쫓기 시작한다. 수정주의 서부극 같은 느낌을 주는 마지막 에피소드는 다른 서부극에서와 같이 목숨을 빼앗는 복수를 실행하는 것에 집중하지 않고 다른 방식의 복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남성들의 전유물과도 같이 여겨지는 서부극 장르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소녀 캐릭터들을 메인으로 내세움으로써 서부극의 관습을 비튼다. 이전의 에피소드들이 모두 성인이 된 여성들을 다뤘다면, 마지막 에피소드는 어린 소녀들의 성장담을 다루었는데 궁극적으로 이를 통해 [로어]는 아직 어린 소녀들이 자신을 가두는 세계에 머무르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을 펼쳐 보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독특한 설정의 드라마를 훌륭하게 마무리 짓는 에피소드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로어]는 에피소드 속 각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여성이 겪는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 중 누군가는 겪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들이 겪은 것과 말하고 싶었던 것들이 세상 속에서 얼마나 무시되고 보잘것없는 것으로 취급되었는지 드러낸다. 오죽하면 제목을 '고함치다, 함성을 지르다'는 뜻인 로어(Roar)로 지었을까. 혹은, 세상 속에서 약하게 취급되었던 여성들이 세상이 정한 자신의 위치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해 으르렁(Roar) 거리는 것을 뜻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로어]는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한 외침이 아니다. 엄밀히 말한다면 [로어]는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혹은 말했으나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것들을 두 팔 걷고 몸소 보여주기 위한 드라마이다. 그렇기에 시즌 1로만 끝나기는 조금 아쉽다. 언젠가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자유롭게 외칠 수 있도록 좀 더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여러 시즌을 통해서 계속 보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