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au par Kenzo pour femme, Parfum d'Ete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사다 주셨던 향수 중에서 제일 좋아했던 향수를 꼽으라고 하면 사실 너무 많아서 양손으로도 꼽기 어려울 것 같다. 질문을 바꿔서,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사다 주셨던 향수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를 꼽으라고 하면 단번에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은 바로 겐조(KENZO)이다.
겐조를 어떤 향수로 제일 처음 접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겐조의 향수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두 가지 제품이 있었는데, 하나는 르빠 겐조 뿌르 팜므(L'Eau par Kenzo pour femme)이고 다른 하나는 겐조 퍼퓸 데떼(Parfum d'Ete)이다. 겐조 향수 중에서 제일 유명한 제품은 플라워 바이 겐조, 르빠 겐조로 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플라워 바이 겐조는 파우더리한 느낌이 너무 강해서 취향이 아니었다. 르빠 겐조 뿌르 팜므는 거의 내 20대 시절을 함께 했던 향수라고 해도 될 정도로 정말 오랜 시간 동안 뿌리고 다녔다. 그 당시 르빠 겐조 바틀이 한번 리뉴얼된 상태였다. 사람들은 이전 바틀의 모양이 더욱 예쁘고, 리뉴얼된 바틀 모양이 별로라고 평했었다. 개인적으로는 리뉴얼된 바틀이 굉장히 멋져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팜므, 옴므로 나눠진 르빠 겐조 바틀을 합치면 두 바틀이 하나로 딱 맞아떨어졌기에 언젠가는 이 향수를 커플로 써보고 싶다는 동경을 품기도 했었다.
르빠 겐조 뿌르 팜므의 향을 한 마디로 설명한다면 ‘오이향’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틀 모양에서부터 알 수 있는 것처럼 물에서 영감을 얻은 향수로 연꽃과 상큼한 시트러스 향이 조화를 이룬 향수인데, 어떤 이들은 오이향이 난다고 굉장히 싫어하는 향으로 꼽기도 했다. 이 향수를 처음에 알게 된 이후 20대 초중반 내내 뿌리고 다녔다. 요즘에는 향조와 향이 주는 느낌에 따라 향수를 계절별로 나누어 뿌리는 편인데, 내가 향수를 뿌리고 다녔을 시에는 계절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 향수를 지금 뿌리라고 한다면 여름에만 뿌리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느낌의 향이었지만 그때 당시 나는 겨울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계절 내내 뿌리고 다녔다. 이 르빠 겐조 뿌르 팜므가 워낙 좋아하는 향수였다 보니 이후 겐조 브랜드 자체에 대한 호감도가 올라갔었다.
이후 처음으로 겐조 향수를 직접 구매했었는데, 바로 겐조 퍼퓸 데떼이다. 아버지가 사다 주셨던 수많은 향수 미니어처 세트 중 그 당시 겐조의 스테디셀러들을 모아놓은 미니어처 세트가 있었는데, 거기에 겐조 퍼퓸 데떼가 들어있었다. 그리너리+플로랄 향조로 싱그러우면서도 우아한 느낌이 드는 향이었는데 겐조 미니어처 제품들 중 이 향을 맡아보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나중에 유럽 여행을 갔을 때 본품으로 구매했었다. 이 향수는 거의 처음으로 직접 본품을 구매했던 향수이기도 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향따(다른 이의 향수 냄새를 맡고 그 향수가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를 당한 제품이기도 하다. 유럽 여행 갈 때 당시 면세점에서 본품을 구매해서 뿌리고 다녔는데, 같이 여행 갔던 언니가 내가 뿌리는 향수가 무엇인지 물어보고 자기도 향을 뿌려달라고 해서 같이 뿌리고 여행을 다녔었다. 이 향수도 사실 르빠 겐조와 마찬가지로 여름에 뿌리는 것이 제일 계절감이 맞는 제품이긴 한데, 한창 추운 겨울이었던 프랑스에서 여행 내내 뿌리고 다녔을 만큼 매력적인 향이었다. 이 향수는 향뿐만 아니라 특이한 바틀 모양도 마음에 들었었는데, 나중에 곱씹어 보니 이 향수의 유일한 단점이 바로 바틀이었다. 향수는 보통 세워두기 마련인데, 나뭇잎을 평면적으로 재현해 놓은 바틀 때문에 어떻게 해도 향수를 세워놓을 수 없었고, 항상 눕혀놔야만 했었다. 그래서 유럽 여행에서 신나게 뿌리고 다니다가도 한국으로 올 때는 누워있는 바틀 때문에 깨질까 봐 옷으로 향수 박스를 꽁꽁 싸매고 짐 속에 조심히 모시고 와야 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로도 겐조 브랜드의 향수에 대한 이미지가 워낙 좋았기에 겐조 정글, 겐조 아무르 아이 러브 유와 같은 다양한 겐조 향수들을 썼었지만, 여전히 내게 있어서 최고의 겐조 향수는 르빠 겐조 뿌르 팜므와 겐조 퍼퓸 데떼이다. 살면서 정신없이 바빠져 향수에 대한 관심이 잠시 멀어졌을 때 자연스럽게 겐조 향수들에서도 멀어졌는데, 이후 다시 찾아보니 르빠 겐조는 계속 나오고 있지만 아쉽게도 겐조 퍼퓸 데떼는 단종된 듯하다. 지금 새롭게 나오는 겐조 향수들도 각 고유한 컨셉을 갖고 있는 향수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뭔가 이전 겐조 향수 바틀에서 봐왔던 개성적이고 독특한 느낌들이 그립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향수 브랜드가 바로 겐조이기에, 내게는 아련함이 함께 떠오르는 첫사랑 같은 브랜드로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