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cci Ricci, The Beat
20대 시절 르빠 겐조를 제일 많이 뿌리고 다녔던 것은 사실이지만 향수를 워낙 좋아했기에 그 외에 다른 향수도 번갈아가면서 뿌리곤 했었다. 디올의 퓨어 쁘와종, DKNY의 비 딜리셔스 오드 퍼퓸, 파코라반 레이디 밀리언 오드 퍼퓸 등을 좋아했었는데 그 당시의 나는 요즘의 취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프루티 한 계열의 향수들을 좋아했던 것 같다.
20대 시절의 가장 특별한 향수들을 꼽으라고 한다면 앞서 말한 향수들이 아닌 다른 두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나는 니나 리찌의 리치 리치 오드뜨왈렛이고, 다른 하나는 버버리의 더 비트 우먼이다. 두 가지 중 니나 리찌는 사실 좀 웃픈 사연(?) 있는 향수이다. 이 향수는 루바브와 베르가못이 탑 노트인데 처음 뿌렸을 때는 뭔가 라즈베리에 가까운 향으로 느껴지는 새콤 달달 향으로 시작된다. 이후 플로럴 향조가 강하게 이어지는데, 보통 오드뜨왈렛은 향의 지속력이 길지 않은 편이지만 이 향수는 거의 오드퍼퓸 수준의 향 지속력을 자랑했다. 20대 시절 나름 여성스럽게 꾸미고 다녔을 때 이 향수를 자주 뿌리고 다녔는데 하루는 이 향수를 뿌리고 가던 중 에피소드가 발생했다. 20대 초중반 당시 대학교가 다소 먼 곳에 있어서 지하철을 타고 강남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아주 지독한 향수 냄새가 나는 것이 느껴졌다. 지하철 입구 쪽에 등을 기대고 서서 가면서 ’아 누가 이렇게 개념 없이 향수를 많이 뿌리고 다녀??‘ 생각하며 짜증이 잔뜩 났다. 그런데 잠깐, 이 향수 냄새 어디서 많이 맡아본 아주 익숙한 냄새이다. 그렇다, 내가 향수를 어마어마하게 뿌리고 나서 지하철을 탔는데,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타인에게 나는 향수 냄새로 착각했던 것이었다. (그때 상황이 너무 웃겨서 SNS에도 올렸었다. 지인들 반응은 한결같았다. ‘ㅋㅋㅋㅋㅋ') 이때 뭔가 깨달았다. 향수를 이렇게 많이 뿌리면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구나! (요즘에는 이를 향으로 인한 공해, 줄여서 향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리고 이 니나 리찌 향수는 너무 많이 뿌리면 안 되는 아주 강한 향이구나! 이후 이 향수를 잠깐 멀리했지만, 그래도 뭔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꾸미고 나갈 때는 종종 뿌리고 다녔던 것 같다.
두 번째 향수인 버버리 더 비트 우먼은 어떤 경험으로 기억되기보다는 향과 그 당시 향을 맡았던 풍경이 기억난다. 버버리 더 비트 우먼은 말 그대로 ‘실론티‘ 향이다. 르빠 겐조를 제외한 다른 향수는 사실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아서 검색의 힘을 빌렸는데, 이 버버리 더 비트는 검색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아직도 향수 이름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이름 자체가 외우기 쉬운 것도 있지만 그만큼 내게 있어서이 향수는 아주 각인이 잘된 향수이다. 이 향수는 해외여행을 다녀오면서 기내 면세점에서 샀던 기억이 난다. 당시 이 향수 냄새를 처음 맡았을 때 기억나는 풍경은 비행기의 창문이 보이는 내 자리에서 향수의 포장을 푸르고 한번 살짝 착향 해본 기억이다. 처음에는 이 향을 맡고 충격받았는데, 이전의 다른 향수들에서 경험해보지 못했던 ‘차(tea)' 향을 향수에서 느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충격이었다. 마시는 차를 이렇게 향수로도 구현할 수 있다니! 거기에 대한 놀라움과 더불어 향 자체가 너무 여성스럽지도 않고 캐주얼하면서도 어느 정도 격식을 갖춘 느낌이랄까. 딱 세미 정장과도 같은 도시적인 무드의 향이었다. 여러모로 두루두루 잘 뿌리고 다닐 수 있던 향이었고 20대에게도 잘 어울리는 향이면서 개인적으로 향도 정말 취향 저격인 향이었다. 바틀도 겉면에 버버리의 상징인 체크무늬가 과하지 않게 들어가 있어서 버버리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센스 있는 작품이다. 여담이지만 집에 향수가 너무 많다 보니 다른 오래된 향수는 색이 변해버려서 남아있는 향수를 버리고는 했었는데, 이 향수는 거의 최초로 공병을 봤던 향수이기도 했다.
찾아보니 니나 리찌와 버버리 향수 두 가지 모두 단종된 듯하다. 니나 리찌는 그렇게까지 아쉽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 버버리 더 비트는 단종된 것이 굉장히 아쉬운데 지금 재출시된다고 해도 다시 구매할 의지가 있는 만큼 요즘 시기에 뿌리기에도 아주 트렌디한 향으로 느껴진다. 아마 이 향들을 다시 맡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설령 향수가 남아 있더라도, 그 향은 이미 변해버렸을 테니까. 하지만 나의 20대 시절의 기억은 여전히 그 향들과 함께 내 뇌리 속에서 영원히 숨 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