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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비극 속 불완전한 삶의 아름다운 ‘완벽성’

<어 퍼펙트 데이> 속 전쟁의 현실을 환기시키는 역설에 대하여

by 송희운

※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하고 작성되었습니다.

※ 본 리뷰에는 <어 퍼펙트 데이>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완벽하다’ 우리는 이 말의 사용에 대해 굉장히 인색한 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완벽하다’의 뜻은 ‘결함이 없이 완전하다’는 뜻으로(이 말은 흠이 없는 구슬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어떤 작은 트집 하나 잡을 수 없이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완벽’에 대해 유난히 까다로운 기준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이 ‘완벽’하다는 단어를 제목으로 내세운 영화가 있다. 바로 <어 퍼펙트 데이>. 이 영화는 도대체 얼마나 ‘완벽’하기에 이를 제목으로 썼을까? 사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완벽’이 아니다. 오히려 전쟁의 현실 한복판에서 절대로 ‘완벽’할 수 없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이나 영화의 형식적인 면 등 모든 것이 ‘완벽’ 하지 않지만 이 영화를 보고 있다 보면 한없이 빠져들게 되고, 어딘가 모르게 끌리는 매력이 있다.





<어 퍼펙트 데이>의 시놉시스는 황당할 정도로 단순하다. 보스니아 내전으로 전쟁 후유증을 앓고 있는 마을에 있는 NGO 구호단체 요원들. 어느 날, 마을의 식수원이 오염되고 이들은 식수원을 정화시키기 위한 유일한 ‘수단’인 밧줄을 찾기 위해 방황한다. 사실 스토리 라인은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어떤 이야기를 보여주기 위한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은 바로 상황과 풍경이다. 전쟁을 겪고 난 마을이라고 했을 때, 일반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릴까? 그것은 온통 폐허로 변해버린 살벌한 건물들의 모습과 어두운 주민들의 얼굴들, 죽은 사람들의 시체,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우는 모습 등 등 등 어둡고 암울한 상황과 비극적인 풍경들만 떠오를 것이다. 당연하다. 우리는 수많은 미디어들로부터 이런 이미지가 바로 ‘전쟁’이라고 배워왔고, 이런 것들을 본 순간 우리는 슬픔을 느껴야 한다는 것을 주입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앞서 이야기했던 풍경들이 이 영화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 속에서는 이런 풍경 속에서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있다. ‘전쟁’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우리도 모르게 떠올리는 모든 고정관념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영화가 바로 <어 퍼펙트 데이>이다.



영화는 첫 오프닝에서부터 우리가 전쟁에 대해 갖는 태도와 인식을 완전히 부셔버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깜깜한 화면에 점점 빛이 들기 시작한다. 처음에 관객들은 그것이 어떤 형태인지 알아보지 못하나, 점점 그림자가 걷히고 빛이 들수록 그것이 우물에 빠진 시체임을 알게 된다. 영화는 그 시체를 전시하지 않는다. 마치 풍경 속에 놓인 수많은 돌들처럼, 시체는 사물의 일부가 되어 카메라 속에 담긴다. 처음 이 시체를 끌어올리던 로프가 사라지자, 구호단체 요원들은 밧줄을 구하기 위해 차를 타고 여정을 떠나기 시작한다. 이들이 멀지 않은 여정을 떠나기 시작하면서 영화 속에서는 보스니아 곳곳의 ‘현실’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사실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은 두 가지 시선밖에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전쟁을 겪은 자의 시선과 전쟁을 겪지 않은 이의 시선이다. <어 퍼펙트 데이>는 전쟁을 겪지 않은 자의 시선으로 전쟁 이후의 모습들을 그려낸다. 전쟁의 현실에 대해서 그것이 얼마나 참혹하였는지, 그것이 얼마나 잔악무도한 일인지 과도한 감성주의나 지나친 잔인성으로 포장하지 않고 전쟁의 이면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아주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일상처럼 그려낸다. 그 일상 속에서 갑자기 불쑥 튀어 나는 전쟁의 날카로운 모습들은 평범함에 안심해 마음을 놓고 있었던 관객들의 마음에 갑작스럽게 파고든다. 그것은 B와 소피가 마을로 들어가기 전 마주친 지뢰가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소의 시체라든지, 식수원을 방해하기 위해 우물에 던져진 시체라든지, 폭격을 맞은 집에 자살한 니콜라 부모의 모습 등 어떤 정지된 ‘사물’의 모습을 통해 드러날 때도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밧줄을 사러 온 이방인들을 잔뜩 경계하는 마을 주민들의 모습들, 자신이 위협당한다고 생각하자 품에서 총을 꺼내는 어린아이, 식수원이 오염되었다고 하는데도 그곳은 이제 평화협정 지역이기 때문에 시체를 치우는 것은 불법이라고 말하는 UN, 전쟁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차도를 통제한 채 포로들을 데리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 등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드러날 때도 있다. 평범한 순간처럼 보일 때 갑작스럽게 폐부를 찌르고 들어오는 전쟁의 잔인한 이면들은 ‘전쟁’이란 것의 현실이 얼마나 끔찍한지 역설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특히 이 점은 이러한 전쟁의 이면을 겪고 체험하는 것이 외부인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특이해진다. 외부인들은 이들의 삶에 개입할 수 없다. 이들의 삶에 어떤 도움은 줄 수 있더라도 이들은 평생 그곳에서 삶을 사는 것이 아닌, 잠시 머물렀다 가는 이방인들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그들은 한쪽 발은 그 전쟁의 폐허 속에 디디고 있지만, 다른 한쪽 발은 자신들이 원래 속했던 현실 속에 디디고 있다. 이 미묘한 경계 속에서 이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 주거나 그저 손을 놓은 채 방관하거나 극단적인 두 선택 중 하나를 택하지 않고, 그들의 ‘현실’에 따른 현실적인 행동들을 취한다. 어린아이인 니콜라가 다른 동네 아이들에게 괴롭힘 당하며 공을 빼앗겼을 때, 그는 니콜라를 도와주지만 총을 빼내든 아이로 인해 공을 되찾아 주지는 못한다. 그들은 마을의 우물 속 시체를 빼내기 위해 하루가 꼬박 걸리는 여정을 떠나 돌아왔지만 결국 시체를 치워주지는 못했다. 그들은 당장의 눈앞에 상황들에 대해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그 모든 상황들을 해결해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그 상황과 현장 속에서 참으로 애매한 위치에 놓인다. 그 상황에 존재하고는 있지만, 의식은 미묘하게 다른 곳을 향해 있달까.




특히 그 현장에서 모든 책임을 지고 있는 맘브루는 그 상황에 속해 있지만 그의 의식은 마치 그곳에서 붕붕 떠다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들의 차 앞에 죽은 소 근처에 지뢰가 있을 수도 있어 차에서 잠을 자야 하는 심각한 순간에도 그는 한때 자신이 만났던 카티야와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고 사랑싸움(?)을 한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머지않아 그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과 자신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그들은 상황에 처했을 때, 그것을 헤쳐나가기 위한 어떤 움직임은 취하지만, 자신들의 원래 삶은 결코 잊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눈 앞에서 전쟁의 참혹한 이면을 봤기에 현실로부터 재빨리 눈을 돌리기 위해 자신들의 원래 삶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들은 전쟁의 당사자가 아닌 이방인일 뿐이며, 이러한 이들의 모습과 더불어 전쟁의 아이러니는 더욱 극대화된다.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니콜라가 공을 빼앗긴 줄 알고 다른 아이들에게 거칠게 행동하는 맘브루의 모습이다. 처음 이 장면을 보았을 때, 전쟁이라는 잔혹한 상황 속에서 아이들에게 권력이 어떻게 세습되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 생각했다. 알고 보니 니콜라는 자신의 부모를 만나기 위해 정말 돈이 필요해서 영화 내내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공을 판 것이었다. 그것은 폭력으로 되풀이되는 권력의 세습보다 더욱 비극적인 것이다.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 아주 어린아이조차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자신의 꿈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 아무도 희망을 꿈꿀 수 없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전쟁의 가장 큰 비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희망’을 놓아주지 않는다. 결국 구호단체 요원들은 우물에서 시체를 꺼내는 것을 실패하고 다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그곳을 떠난다. 난민 캠프의 변소가 흘러넘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차를 타고 이동할 때, B가 이렇게 이야기한다. “비가 오지 않으면 최악은 아닐 거야.”(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느낌의 대사였던 것 같다.)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순간 차 밖에서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이 비는 보스니아의 모든 곳에 내린다. 이방인들에게 적대적이었던 마을 사람들에게도, 홀로 남아 자신의 건물을 지키던 남자에게도, 군인들에게 붙잡혔던 포로들에게도, 그들을 제지했던 UN에게도. 이 비는 결정적으로 우물물을 흘러넘치게 만들어 그 속에 있던 시체를 꺼낼 수 있게 해준다. 각자 사정에 따라 제대로 행동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덮어주기라도 하듯이 비는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내리고, 우물 속 시체가 빠져나온 뒤, 영화는 미약한 희망의 빛을 심어주고 엔딩을 맞이한다.





우리들에게 삶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영화 속에서 소피가 니콜라에게 주기 위한 공을 찾은 다음, 맘브루가 목을 매달고 자살한 부모들의 모습을 보는 것. 충격적인 상황 속에서도 살아있는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자살하는데 썼던 밧줄을 풀어서 가지고 가는 것. 전쟁이라는 아주 잔인하고 특수한 상황 속에서도 삶은 계속 흘러간다는 것. 그곳에서 비극과 절망과 아픔이 매일 피어나고 있지만, 그 이면 속에는 우리가 보지 못했던 작은 희망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는 것. 마치 판도라의 상자 속 좌절한 판도라 앞에서 상자에 단 하나의 희망이 남아있던 것처럼 <어 퍼펙트 데이>는 전쟁의 비극과 고통을 평범한 삶의 유머와 부딪히며 역설적으로 드러내면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한줄기 희망을 보여준다. 완벽하게 컷팅되어 있는 세공품은 아니지만, 이만큼 전쟁에 대해 독특한 시선으로 그려내면서도 그 속의 긍정을 품어내는 영화가 어디 있을까. 이런 투박함이야 말로 삶의 ‘완벽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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