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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고통 그 이면에는 늘 행복이 서 있었다.

<아기와 나>, <리빙보이 인 뉴욕>에서 만난 ‘삶’에 대하여

by 송희운

※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하고 작성되었습니다.

※ 본 리뷰에는 <아기와 나>, <리빙보이 인 뉴욕>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노 시온 감독의 <차가운 열대어>라는 작품에서 이런 대사를 들은 적이 있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이 딸에게 “인생은 고통이야!!!”라고 소리치는 남자 주인공. 영화 자체가 강렬하기에 인상적인 것도 있었지만 이 영화를 보고 몇 년이 지나도 그 대사는 내 뇌리 속에 남아 늘 맴돌고는 했었다. <아기와 나>와 <리빙보이 인 뉴욕>, 이 두 영화를 이야기하는데 왜 갑자기 뜬금없이 <차가운 열대어>라는 작품을 먼저 꺼냈을까. 그것은 이 두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가 이 대사와 긴밀히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두 작품의 결과 톤 앤 매너는 상당히 다르지만 두 영화 모두 ‘삶’을 다루고 있고, 살면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고통을 겪은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인생은 고통이야”라고 말하는 대사가 두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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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삶을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각자 자라온 환경과 각자의 성격과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하고, 서로 다른 선택을 하면서 다른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결국 하나의 문제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아기와 나>의 도일과 <리빙보이 인 뉴욕>의 토마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아기와 나>의 도일은 삶에 대한 마땅한 계획도 없고, 그저 여자 친구와의 결혼을 기다리며 제대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의 삶은 특별한 일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리빙보이 인 뉴욕>에서의 토마스는 작가가 되고 싶지만 제대로 꿈도 이루지 못하고 썸을 타는 미미와는 항상 제자리걸음이다. 그의 인생도 매우 따분하고 무료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며,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다. 사실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 매일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삶.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삶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내 인생을 살고 있으면서도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 때가 더욱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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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인생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변화의 순간을 맞이한다. 아니, 가만히 있던 우리에게 인생이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사건을 던져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기와 나>에서 도일은 오랜 휴가를 나와서 모처럼 여자 친구, 아기와 함께 즐거운 소풍도 즐기지만 우연히 아기가 아파서 갔던 병원에서 아기의 혈액형과 자신의 혈액형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사실을 여자 친구에게 이야기하려 했지만, 먼저 눈치를 챈 여자 친구는 그대로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여자 친구를 찾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니지만 여자 친구의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다. 그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하고 척박한 생존의 현장으로 내던져졌다. <리빙보이 인 뉴욕>에서 토마스는 미미와 만나던 중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이 전혀 모르는 낯선 여자와 다정하게 함께 있는 것을 본다. 아버지에게 왠지 모를 배신감을 느꼈지만, 막상 아버지에게 말할 수 없었던 토마스는 아버지에게 말하는 대신, 그 여자를 몰래 미행하기 시작한다. <아기와 나>의 도일이나 <리빙보이 인 뉴욕>의 토마스나 두 사람 모두 몸은 장성한 ‘어른’이지만 아직 실제 삶에서는 미성숙한 면모를 모이는 ‘소년’들이다. 몸은 어른의 것이지만, 정신은 아직 갖춰지지 않은 소년의 것. 이들은 주류사회 속으로 편입되지도 못하고 그 주변을 맴돌며 방황하는 존재들이다. 각 영화들을 이 소년들을 보여주는 방식에서 조금 다른 면모를 보인다. 장르로 따진다면 <아기와 나>는 최대한 각본을 배제한 다큐멘터리 같고, <리빙보이 인 뉴욕>은 깔끔하게 정리된 블랙코미디 같다. 언뜻 한쪽은 무겁고, 한쪽은 가벼워 보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단지 두 영화가 보여주는 방식이 다를 뿐 ‘삶’에 대해서 두 영화 모두 진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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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신체가 일치하지 않는 불균형의 틈 속에서 소년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것은 일종의 회피였다. <아기와 나>의 도일이 애타게 여자 친구를 찾았던 것은 자신이 아기를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였고, <리빙보이 인 뉴욕>의 토마스가 아버지의 내연녀와 사랑에 빠진 것도 지금 이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두 영화의 톤 앤 매너가 다르더라도 두 ‘소년’에게 처해진 상황이라는 것은 사실 매우 잔인한 것들이다. 아무런 준비조차 되지 않았는데, 그들은 갑자기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고 자꾸만 제 자리에 머물고 싶어 하는 그들에게 삶은 자꾸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그들이 처한 것이 ‘현실’이라고. <아기와 나>에서는 이러한 삶의 고통이 주인공의 클로즈업을 통해 드러난다. 군대에서 후임과 이야기를 할 때 단 한 장면을 제외하고 영화는 온통 핸드헬드로 가득 차 있다. 도일의 얼굴에 밀착된 카메라는 감출 수 없는 얼굴 표정을 극대화하여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도일의 고통은 마치 관객들이 자신의 삶에서 느끼는 듯한 고통으로 생생하게 전해진다. <리빙보이 인 뉴욕>의 토마스 같은 경우에는 도시의 풍광이 그의 감정을 나타내는 하나의 캔버스가 된다. 35mm 카메라로 담아낸 뉴욕의 풍광은 그동안 수없이 봐왔던 엽서 속에 담긴 뉴욕의 대표적인 세련된 이미지가 아닌 골목길, 공원 등 실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뉴욕의 거리가 자연스럽게 담겨 있다. 평범해 보이는 뉴욕의 풍광 속에서 주인공은 계속해서 방황한다. 어딘가 안착하지 못한 채, 조한나에게 열병처럼 빠져들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제랄드에게 계속해서 칭얼거린다. 글을 쓰고 싶지만, 아버지는 그런 그를 반대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글을 보여주고 싶어 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아닌 아버지의 곁에 계속 머물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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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늘 그러하듯, 삶은 내게 닥친 '현재'를 밀어내려 할수록 마치 올가미처럼 얽혀들며 나의 심장을 더욱 옥죄게 하기 마련이다. 끝끝내 여자 친구를 찾지 못한 도일은 할 수 있는 만큼 아기를 돌보며 지내려 하지만, 어머니가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일과 육아를 동시에 병행할 수 없는 현실에 점점 지쳐가기 시작한다. 군대에서 나가면 어떻게 될까 걱정했던 것처럼 도일에게 갑작스럽게 닥친 삶의 무게는 너무나 버거운 것이었다.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했던 삶의 태도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변명이 되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아이가 아닌 아기를 입양 보내기로 결정한다.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 토마스.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아직 자신이 몰랐던 또 다른 진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이 친아버지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불임이었고, 자신의 옆집에 살면서 자신에게 수많은 조언을 해주었던 남자가 사실은 친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오직 어머니만 희생자라고 생각했는데, 어머니와 아버지의 결혼이 허울뿐이었다는 사실을. <아기와 나>에서 비치는 삶은 참으로 비극적인 것처럼 보인다.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삶은 관객들과 너무 밀접하게 붙어 있어 도일의 모든 고통이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리빙보이 인 뉴욕>에서 삶은 조금 더 부드러운 듯 보이지만, 마치 평온해 보이는 수면 위로 커다란 돌이 던져지는 순간 수면이 급격하게 요동치는 것처럼 삶의 겉표면을 한 꺼풀 벗겨내면 그 표면 아래에는 예상할 수 없었던 진실들이 들끓고 있다. <아기와 나>에서 잘 살아보려고 했는데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이야기하는 도일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냥 살면 돼” 삶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치 비수처럼 날아오는 고통들을 맞닥뜨리면 누구나 좌절하고 절망한다. 그것은 갑자기 가장이 되어야만 했던 도일에게도 그러했을 것이고, 뜻하지 않은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된 토마스도 그러했을 것이다. 삶 속의 고통은 마땅한 극복법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유일한 극복법이 있다면, 그것은 살아가는 것이다. 때로는 나보다 먼저 삶을 살고 있는 어른들은 이 모든 과정과 고통에 익숙해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 어른들도 분명 이번 생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알고 있지만 어른이기에 묵묵히 참아야 했던 것들. 그래서 도일의 어머니도 묵묵히 살아왔을 것이고, 토마스의 어머니와 진짜 친아버지도 굳이 자신들이 먼저 비밀을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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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때로는 삶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순간이 찾아온다. “삶은 고통이야”라는 대사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좌절과 절망의 순간이 너무 많다. 난 단순히 ‘언젠가는 행복이 찾아올 거야’라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이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어린아이의 말장난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인생이 늘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그 고통을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다 보면 고통은 자연스럽게 삶으로 녹아든다. <아기와 나>의 도일과 <리빙보이 인 뉴욕>의 토마스 모두 자신만의 방법으로 그 고통을 극복해낸다. 남들이 말하는 대로 내 자식이 아니라고 해서 아기를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한 도일은 아기를 다시 데리고 온다. 그 앞에는 망설이며 병원으로 차마 들어가지 못했던 여자 친구 순영이 있다. ‘어른’이 된 도일은 처음에는 그녀를 붙잡지 않는다고 가라고 원망하지만, 이내 그녀를 받아준다. 그녀에게도 그녀만의 사정이 있음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신의 가족에게 얽혀있던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토마스는 어머니와 친아버지를 이해한다. 그들에게 가서 담담하게 자신이 알게 된 진실을 털어놓으며 그들에게 “괜찮다”라고 해준다. 그들이 자신을 배신하고 속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두 명의 소년은 삶 속에서 고통과 마주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었다.




사람들은 흔히 고통을 통해 성숙한다고 이야기한다. 고통을 겪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 말이 그저 지나가는 말에 불과하겠지만, 고통을 겪고 난 이들은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다. 삶 속에는 우리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 수많은 고통이 도사리고 있다. 고통은 그 자체로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부딪히다 보면 생각보다 고통의 무게가 적을 때도 있고 무수한 시간이 흐르면 그 고통은 조금 희미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 모든 고통이 지나가면 아니, 고통의 순간 속에서도 행복은 찾아온다. 행복은 물질적인 풍요에서 오는 행복이 아닌, 고통 속에서도 행복이 찾아온다는 그 자체가 '행복'이다. 잠시나마 누군가를 만나서 즐겁게 웃을 수 있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순간, 내가 꿈꾸던 것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들, 나 자신의 경계와 세계를 확장시켜나가는 것 등 등 등. 고통과 행복은 서로 마주치지 않는 평행선처럼 보이지만, 사실 고통의 이면 속에서는 늘 행복이 존재한다. <아기와 나>에서 도일과 순영이 아기와 함께 하나의 가족으로 단란하게 있는 마지막 장면처럼, <리빙보이 인 뉴욕>에서 아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 친아버지의 소설 낭독회에 어머니가 찾아가는 마지막 장면처럼 행복과 고통은 언제나 공존한다. 행복과 고통 무한한 범주에서도 서로 겹쳐지는 그 중심, 거기에 바로 삶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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