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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희운 Aug 25. 2018

디지털 시대, 광기는 랜선을 타고

<서치>를 통해 돌아본 우리들의 ‘랜선 라이프’에 대하여

※ 이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영화를 관람하고 작성하였습니다.

※ 이 리뷰는 영화 <서치>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도 핸드폰으로 컴퓨터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온라인을 통해 모든 것이 연결되는 삶에 대해 사람들은 ‘랜선 라이프’라고 말한다. 너무 익숙해져서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했던 이 '랜선 라이프'를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본다면 어떨까? 익숙하게 느껴졌던 것들을 한 발짝 물러서서 봤을 때 드는 낯선 느낌들. 영화 <서치>는 이렇게 익숙했던 우리의 ‘온라인 삶’을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게 만든다. 그러한 낯선 느낌이 드는 순간들 속에서 이따금 우리가 가졌을지도 모르는 ‘광기’의 얼굴을 마주한다.  



<서치>의 가장 공포스러운 지점은 우리 생활 속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온라인 상의 모든 것들이 너무나 쉽게 다른 이들에게 공유되고, 다른 이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치>가 보여주는 맥북, 아이폰, 유튜브 등 온라인 상 화면들은 평상시에는 우리의 뜻대로 선택하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화면들이다. 우리가 원할 때 언제든 정보를 찾고 검색하고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들. 하지만 <서치>에서 마주한 이 화면들은 더 이상 우리 뜻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들이다. 영화 속에서는 오로지 아버지인 ‘데이빗’의 의지대로만 움직일 수 있다. 매일 익숙하게 봐왔던 것들을 더 이상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무력감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이 된다. 


왼쪽 - <서치> 스틸 / 오른쪽 - <이창> 스틸


관객들이 느끼는 ‘무력감’은 마치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이창>에서 주인공인 제프가 겪는 무력감과 유사하다. <이창>에서 제프는 다리를 다쳐 움직이지도 못하고 오직 자신의 방에만 머물 수 있다. 그는 창 밖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알고 있지만, 그 일에는 관여할 수 없다. <서치> 속 관객들도 마찬가지이다. 마고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왜 없어진 것인지 관객들의 궁금증은 계속해서 커져가지만, 관객들은 오직 데이빗의 움직임만 따라갈 수 있다. 기존 영화 속에서 관객들의 위치는 드러나지 않은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이창>과 <서치>에서도 물론 관객들의 위치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두 영화는 모두 원래 그 자리에 존재했던 관객들을 마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곳’에 있는 것처럼 만든다. 두 영화의 차이점이라면, <이창>에서 제프는 창 밖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창’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보고 있고, <서치>에서는 관객들이 ‘스크린’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보고 있다는 점이다. <서치>가 <이창>보다 공포스러운 지점은 <이창>에서 제프의 행동 제한은 신체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에서 오는 것이지만, <서치>에서 관객들이 느끼는 무력감은 온전한 신체를 갖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서치>에서 한 가지 공포스러운 지점이 더 있는데, 그것은 인터넷 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우리가 한때 인터넷 상에서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이러한 순간들이 보이는 장면은 바로 마고의 흔적을 찾기 위해 데이빗이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와 마고가 사라진 뒤 이 친구들이 보였던 반응들이다. 데이빗은 마고의 행방을 찾기 위해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수많은 SNS에서 마고의 흔적을 찾지만 그녀와 정말 친한 친구를 찾지 못한다. 온라인 상에서 친구들은 단지 마고에 대해 그냥 동급생, 혹은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돌봐줘야 되는 사람 등 그들에게 마고는 그저 타인이다. 마고의 실종이 알려지고, 온라인 상에서 마고의 소식에 대한 여러 가지 소식이 돌자 이들의 태도는 모두 돌변한다. 유튜브를 통해 마고와 자신이 얼마나 친했는지를 토로하고, 페이스북을 통해 자신과 친밀했던 마고가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바란다는 글을 쓰는 등 이들은 사람들에게 ‘좋아요’와 관심을 받기 위해 거짓 연기를 자행한다. 트위터에서 핫이슈로 ‘마고의 실종’이 떠오른 것도 모두 같은 맥락이다. 



이런 사람들의 가식적인 모습만이 아니라, 마고의 실종은 한 존재가 사라진 것이 아닌 온라인 상에서 자신들의 호기심과 재미를 채워주기 위한 하나의 오락거리로 전락한다. 마고의 실종은 심심했던 사람들에게 단지 무료함을 달래줄 속된 말로 하면 '씹기 좋은 안주거리'로 전락한다. 이때 개인의 인격은 철저하게 사라지고 무시당한다. ‘마고’는 온전한 존재로 사람들의 이야기와 말속에 존재하지 않고, 온라인 속에서 무수히 떠다니는 하나의 가십거리에 불과하다. 이렇게 온라인 상에서 가식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한 사람을 하나의 인격이 아닌 재미난 오락거리로 삼는 것. 이는 의식하던 의식하지 않았던 우리가 온라인 상에서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우리의 또 다른 얼굴이다. 우리가 행했던 일들을 한발짝 물러서서 제 3자의 위치에서 보게 될 때,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 아이러니한 지점은 이렇게 마고가 오락거리로 전락하고 있는 상황들 속에서 데이빗이 마고의 실종에 얽힌 미스터리를 찾아 헤매는 단서가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는 극을 전개하기 위한 선택인 동시에 관객들이 자신들을 돌아보게 만드는 하나의 장치가 된다. 



군중 속에서 숨어 있는 광기는 낮게 울면서 희생자를 만들기 위해 계속 사람들 사이를 헤맨다. 누군가의 관심을 받기 위한 광기이거나, 재미를 위해 누군가를 자신의 희생양으로 삼기 위한 광기이거나 모든 광기들은 항상 제물을 찾아 헤맨다. 이는 인간의 삶 속에서 언제나 존재해왔었지만, 온라인 시대 속에서 광기는 마치 바이러스처럼 랜선을 타고 퍼져나간다. 무서운 것은 이 광기가 퍼져나가는 속도이다. 이 속도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칠 듯이 빠른 속도로 퍼져나간다. <서치>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은 온라인 공간 속에서 광기는 마치 마른 장작에 던져진 하나의 불씨처럼 주체할 수 없이 빠르게 퍼져나간다. 현대 시대에서 광기는 익명성을 무기로 삼아 더욱 거대해지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본질을 잊게 만든다. 



디지털 시대라는 화두로 시작해서 영화에서 보이는 모든 화면들은 ‘실재’가 아닌 온라인 속 허상에 불과하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을 행하고 있는 것은 온라인 밖 현실 속 살아있는 인물이다. 다른 영화와 달리 <서치>는 처음부터 끝까지 촬영된 화면이 아닌 온라인 화면을 보여주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인간성의 존엄을 증명한다. 엔딩에서 모든 것을 이뤄낸 것이 형사가 아닌 아버지인 것처럼 광기의 홍수 속에서도 인간성은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다. 아니쉬 차간티 감독은 보도자료에서 나온 단어인 ‘스크린 라이프’를 통해 사람들 사이에 숨어있는 광기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속에서도 남아있는 인간성을 드러낸다. 즉, 이는 사람들이 ‘스크린 라이프’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누군가를 공격하는 검이 될 수도 있고 따뜻한 온정을 전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보여주는 것이다. 엔딩에서 보이는 배경화면처럼 <서치>는 우리에게 ‘온라인’이라는 무한한 공간을 어떻게 쓸 것인지는 우리 선택의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영화’라는 매체는 늘 그러하듯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 고민한다. 그것은 이야기의 형식이 될 수도 있고, 영상 내에서 색다르게 표현하는 방식이 될 수 있고, 촬영 방식이 될 수도 있고 영화 속에서는 어떠한 것이든 다양하게 선택되고 행해질 수 있다. 우리의 현실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것들을 통해 삶을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 그것이 영화라는 매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서치>는 내가 봤던 모든 영화들을 통틀어서 가장 혁신적인 영화적 체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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