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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희운 Jan 03. 2019

처연하게 빛나는 찬란한 청춘이여

자유를 꿈꾸는 모든 청춘의 이야기 <레토>

※ 이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영화를 관람하고 작성하였습니다.

※ 이 리뷰는 <레토>의 엔딩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맨 처음 <레토>란 영화를 보고 싶었던 이유는 빅토르 최란 인물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 때문이었다. 한국계 러시아 록가수로 소비에트 정권 시절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었던 인물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기 때문에, 주저없이 <레토>를 선택했다. 사실 <레토>는 내 기대와는 다르게 빅토르 최라는 한 인물의 삶의 굴곡에 집중하기 보다는 빅토르 최와 그의 멘토이자 록가수였던 마이크와 그의 뮤즈 나타샤 세 사람의 이야기에 가깝다. 그래서 내가 영화를 보고 실망했냐고? 내 대답은 ‘No’다. 처음 영화를 본 이후부터 OST를 들으면서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 영화의 모든 순간은 생생하게 살아 내 마음 속에 남아있다.



<레토>는 누구나 살면서 느꼈을 뜨거운 청춘의 한 순간을 다룬 이야기이다. 청춘의 뜨거운 순간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지만, 이들의 청춘이 절정에 달한 시기가 소비에트 정권이 통치하던 시대라는 것은 특이점을 지닌다. 자유가 이름 뿐으로 존재하던 시절에는 노래를 아무데서나 부를 수도 없었고, 공연장에서조차 마음껏 록을 연주하고 즐길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정부가 허락한 적정선에 한해서만 가능했다. 이런 제한된 환경에서 록가수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그것은 잠들지 않고 영원히 꿈을 꿔야만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현실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곳에서 영원히 머물 수 없기에 계속해서 환상을 향해 날아가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현실과 환상 그 중간 어디쯤에 놓여있다. 이따금 토킹 헤즈, 이기 팝, 루 리드의 노래가 현실을 침범해 들어와 영화 속 인물들과 섞이며 뮤직비디오와도 같은 화면들이 연출되면서도 안경을 쓴 한 남자가 나타나 이것은 현실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특히 이 현실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장면들은 주로 ‘억압’이 발생한 장면들이다. 기차에서 록을 부르자 이에 미국의 노래를 부른다며 비난하는 사람들과 싸움을 벌일 때 라든지, 록 공연장에서 앉아서만 공연을 보다가 다같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공연을 즐길 때 라든지, 혹은 빅토르가 자신의 멘토인 마이크의 부인 나타샤와 함께 차를 타고 가는 장면이라든지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혹은 일어나서는 안되는 ‘억압’의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이 환상이 드러난다. 영화는 현실 속에 자연스럽게 환상을 뒤섞어 놓다가도 안경 쓴 남자를 통해 이것은 현실이 아니라고 다시 한번 강조한다. 마치 절취선처럼 등장하는 이 남자를 통해 영화는 현실과 너무나 닮아있는 이 환상들이 현실이 될 수 없었던 그 시절의 삶과 이러한 삶을 살고 있는 자유로운 청춘을 보여주며 묘한 아이러니와 서글픔을 자아낸다.



이러한 현실과 환상 사이를 자유롭게 오고 가는 영화의 형식은 영화의 제목과도 연결된다. 러시아어로 여름을 뜻하는 레토(Leto). 뜨거운 여름날의 햇빛이 내리쬐는 것처럼 한 때 누군가가 지나온 삶의 흔적들은 이제 필름 속에서 다른 누군가로 인해 재생되면서 반짝이고 있다. 마치 여름날의 햇빛과도 같은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분위기는 무대 위 조명과도 비슷한 느낌을 자아낸다. 영화 속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를 때, 그들의 얼굴에 강렬한 조명이 내리쬐는 것처럼 청춘을 지나고 있는 영화 속 인물들의 모든 삶은 매 순간 마다 반짝거리며 빛을 낸다. 그러한 인물들의 중심에 바로 '빅토르'가 있다. 빅토르는 무대 위 빛나는 조명처럼 자유와 꿈을 영원히 노래하며 다른 누군가가 마음대로 재단하기 위한 ‘내’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를 완성하는 것은 엔딩 장면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도 우리는 이미 영화 속 빅토르 최가 급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무명의 시간을 지나 키노(KINO)라는 밴드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는 빅토르 최의 무대 모습이 비칠 때, 그가 이 땅에서 살다간 시간이 얼마나 짧았는지를 보여준다. 뒤이어 그의 멘토였던 마이크 나우멘코의 옆에도 그가 출생했던 년도와 사망한 년도가 함께 드러난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핵심은 바로 이 마지막 장면에 있다고 생각한다. <레토>는 여름의 뜨거운 태양과 함께 빛났던 청춘의 한 페이지이면서 동시에 뜨겁게 살다간 죽은 자들을 추억하는 산 자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를 만들어서 전하는 것도 바로 산 자이고, 이들의 삶을 지켜보는 이도 모두 산 자이지만, 결국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이미 세상을 떠난 자들인 것이다. 억압과 해방, 현실과 환상, 죽은 자와 산 자 모든 것들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이 영화는 이러한 경계들을 부수면서 궁극적으로는 자유를 이야기하고, 자유를 꿈꿨던 그 시대 모든 이들에 대한 추모로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생소한 러시아어로 진행된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떠한 형태의 언어이든 이 영화가 말하는 청춘의 열망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을테니. 찬란하고 처연하게 빛났던 청춘의 순간을 만나고 싶다면 <레토>를 꼭 보시기를.


+ 덧 :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은 루 리드의 'Perfect day'를 부르는 장면이었다. 빅토르 최가 나오는 장면이 아닌, 마이크 나우멘코가 등장하는 장면이었지만 빗속에서 서글프게 들리는 멜로디와 가사가 서로 대조를 이뤄 묘한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루 리드 원곡도 들어봤지만, 영화 속 그 장면과 멜로디가 계속 머릿속에서 떠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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