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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희운 Jan 28. 2019

바를 정자를 올바르게 써 내려가는 올곧음

올바르게 산다는 것에 대해 말하는 <증인>

※ 이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영화를 관람하고 작성하였습니다.

※ 이 리뷰는 <증인>의 엔딩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증인>은 한국영화 중에서 보기 드물게 바르고 올곧은 영화이다. 최근에 개봉했던 한국 영화들 속에서 흔히 살펴볼 수 있었던 잔인함과 폭력성은 최대한 자제하고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하나만을 향해 달려간다. 이런 올곧은 영화들은 때때로 대중들의 큰 환호를 받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하나는 올바른 영화가 재미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또 다른 이유는 ‘올바름’에 대해 이야기할수록 영화가 관객들을 가르치려 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올바른' 영화들이 이런 형태를 갖고 있을지도 모르나 적어도 <증인>은 재미가 없거나 쉽사리 가르치려 드는 영화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증인>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주인공을 통해 오히려 관객들이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묵직한 힘을 가진 영화였다.



<증인>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며,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가치는 정말로 단순하다. 그것은 ‘바르게 사는 것’. 우리의 삶 속에서도 바르게 사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만큼, 영화 속 주인공들도 이에 부합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해야만 했고, 애써야만 했다. 로펌 변호사 순호는 자신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갖고 있었지만, 자신의 출세를 위해 정의 앞에서 눈을 감아야만 했고, 지우는 두려워하는 법정까지 가서 증인이 되려 했지만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장애를 드러냈을 때 망신을 당해야만 했다. 우리는 굳이 이 영화에서 보지 않더라도 이 세상이 약한 자들에게 얼마나 잔인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정의를 위해 진실을 이야기했을 때, 종종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신에게 불리하게 적용될 수 있는 그 정의를 두려워해 약한 사람들을 짓밟고 입을 막아버렸다. 그렇기에 우리는 순호와 지우에게 쉽게 동일시될 수 있다. 우리는 순호처럼 때때로 출세를 위해 눈 앞의 정의에 눈을 감아버렸고, 우리는 지우처럼 때때로 자신의 약한 부분을 수많은 사람 앞에서 억지로 내보이며 비웃음 거리가 되어야만 했다. 이렇게 녹록지 않은 영화 속 현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마치 한 면처럼 겹쳐져 이 연약한 인물들과 우리를 연결하여 그들이 느끼는 감정들을 유사하게 느끼게 한다. 



이러한 감정선을 가장 잘 느끼게 만드는 캐릭터는 바로 ‘지우’이다. 그동안 한국 영화 속에서 장애를 가진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했지만 이 <증인>에서처럼 장애를 가진 이를 도구화, 희화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한 인물로 그리는 영화는 드물었다. 그 속에서 영화는 장애를 가진 아이에 대해 이들을 대하는 현실이 얼마나 각박했는지, 장애를 가진 아이들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지 꽤나 현실적이고 직설적으로 풀어낸다. 이러한 연기를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드는 것은 지우를 연기한 김향기 배우와 지우 어머니 현정 역을 맡은 장영남 배우의 연기이다. 특히 김향기 배우는 ‘지우’의 특성을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기 위해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폐를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자폐 증상이 ‘지우’라는 캐릭터가 갖고 있는 수많은 특징 중 하나임을 보여준다. 지우의 어머니인 현정이 지우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대사인 “그건 지우가 아니잖아요”라고 말하는 순간은 단순히 영화 속 지우에게만 해당되는 대사일 뿐만 아니라 영화를 통해 김향기 배우가 드러내고자 하는 메시지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다양한 매체들이 장애인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모범적인 답안을 제시한다.



영화는 이러한 세세한 묘사를 위해 종종 느리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꽤나 느린 템포로 순호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게 하다가도 그만큼 우직하고 묵직하게 밀어붙이며 곧바로 다시 바른 길을 걷도록 만든다. 순호가 바른 길로 올 수 있도록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지우인데, 영화는 이를 통해 우리가 갖고 있는 정의에 대한 신념이 설사 흔들릴지언정 언제든 다시 되돌아올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올곧은 나뭇가지 하나는 쉽게 부러지지만 부러졌더라도 그 올곧음은 변하지 않는 것과도 같다. 이렇게 영화는 '바를 정(正)'자 하나를 새기기 위해 한 획 한 획 신중하고 올바르게 그어나간다. 그러면서도 이 말을 잊지 않는다. 정의를 지킨다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라고. 그렇기에 마지막 장면에서 지우가 순호에게 “아저씨는 좋은 사람입니다”라고 했을 때, 순호가 울면서 “노력해볼게” 답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 올바른 가치를 위해서 끊임없이 투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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