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단상과 쓸모에 대하여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보고)
[1] 프롤로그: 인사이드 아웃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감정 컨트롤 본부 그곳에서 불철주야 열심히 일하는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 다섯 감정들. 이사 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라일리’를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감정의 신호를 보내지만 우연한 실수로 ‘기쁨’과 ‘슬픔’이 본부를 이탈하게 되자 '라일리’의 마음속에 큰 변화가 찾아온다. '라일리'가 예전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는 ‘기쁨’과 ‘슬픔’이 본부로 돌아가야만 한다!
- 영화 「인사이드 아웃」 시놉시스 중에서
크리스마스를 믿는 어린아이처럼 동화 같은 영화의 설정을 그대로 받아들이자. 두뇌 속에는 감정을 바탕으로 하는 다섯 인격이 있고, 그 가운데 슬픔이란 인격도 있다고 하자. 하여 그 슬픔이 푸른빛으로 물든 기억을 보관해 둔 저장소에 간다면, 그때의 슬픔은 어떤 구슬을 손에 쥐고 슬퍼할 수 있을까*. 오늘의 이야기는 그런, 슬픔을 기억하는 슬픔에 대한 이야기이다.
* 푸른빛과 구슬은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설정을 빌린 표현이다. 영화에서 '슬픔'이라는 감정 인격은 파란색인데 슬픔의 손이 닿는 기억은 모두 푸른빛으로 변하며, 인간의 기억은 구슬 형태로 창고 같은 곳에서 저장되어 인격화된 감정들에 의해 관리된다.
[2] 당위라는 이름의 폭력
처음으로 야전 훈련을 받던 그날의 슬픔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주파수가 어긋난 라디오처럼 불분명한 전언(傳言)을 중얼거리던 무전기의 전파도 잊히지 않는다. 선명하게 날개 짓 하던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끊임 없이 쏟아지던 밤이었다. 가늠되지 않는 전역일처럼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았고, 그럼에도 총총한 별은 유난히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어쩌자고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나는 낙상하는 버스처럼 언덕에서 미끄러졌다. 우지끈하고 발목 아래서 끊어지던 잡목들과, 밑동을 잘린 나무처럼 기울어가던 몸의 감각을 잊을 수 없다. 나는 잠시 폐목처럼 쓰러져 어리둥절했다.
쉬었다 갈게요.
라고는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시큰하던 발목을 붙들고 밤새 걷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는 생각이다. ‘장교는 그래’라거나 ‘전쟁은 더해’라는 훈련의 당위를 얼핏 들은 듯도 싶지만, 이후의 기억들은 세월을 지나온 무전의 전언처럼 불분명하다. 산길을 헤매던 그날의 청춘은 온데간데없고, 시큰한 발목을 주무르는 마흔 무렵의 내가 부질없이 당위를 반추하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 나를 붙들지 못한 당위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왜 당위적이지 않았던 당위를 거부하지 못했던 건가.
돌이켜 보면 그것은 당위라는 이름의 폭력이었다.
[3] 슬픔을 잃어버린 슬픔
사흘이 지난 주말에야 병원에 갔다. 발목 아래 우지끈 소리를 내며 끊어진 것은 잡목이 아니라 인대였다. 나는 그것을 걸음으로 전해지는 감각이 아니라 의사가 일러주는 진단으로 알았다. 인대 파열이란 진단을 들었을 때, 마음을 지지하던 마지막 인대가 파열하는 기분이었다. 인대가 끊어진 줄도 모르고 몸만큼 무거운 군장을 짊어진 채 밤새 산길을 걸었구나. 미련하고 아둔해서 탓할 곳도 없구나. 그제야 후회가 막급하게 밀려왔다.
독신자 숙소에서 흩어진 신발을 정리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오른쪽 전투화만 흩어진 모습에 마음이 그랬다. 디디고 서지 못하는 왼발을 보면서는 더욱 그랬다. 깁스를 풀고 바닥에 누인 왼발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져 있었다. 그 모습이 나와 닮아서 처연했다. 나는 가누지 못한 왼발처럼 바닥에 엎어지며 서럽게 울었다.
며칠 후, 부대에서 사람이 죽었다. 사인(死人)이 남긴 사인(死因)은 불분명했다. 나는 당직이나 상황 근무를 통해 그와 목소리를 주고받은 일이 있으나, 사무를 넘어선 교유가 없었으므로 그의 부고를 사무적으로 받았다. 부대는 그의 장례 절차를 공문으로 알렸다. 그의 삶은 공문 속에서 공적으로 소멸했다. 나는 공적으로 소멸한 그의 삶처럼,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사라진 나의 슬픔을 찾을 길 없어 슬펐다.
[4] 슬픔을 위로하는 슬픔
정호야 기억하지. 초등학교 3학년쯤이었을까. 추석에 할머니 집 가는 길이었는데, 길이 많이 막혔었지. 정호가 소변이 마려워서 찻길에 내렸는데, 체증이 풀려서 차가 슬슬 앞으로 가기 시작한 거야. 그래도 볼 일을 다 보고 코스모스가 핀 가을 길을 막 뛰어오는 네 모습이 정말로 귀엽고 사랑스럽고 해맑았다. 어린 시절 정호는 엄마에겐 끝없는 행복이고 즐거움이었단다.
- 2011년 2월, 엄마의 편지에서
북한군 초소가 내다보이는 DMZ에서 엄마의 편지를 읽었다. 살아 엄마와 가장 먼 곳에 떨어졌는데, 편지를 받은 날 엄마와 가장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편지를 읽은 나는 잠시 코스모스 핀 가을 길을 뛰어다니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해졌다.
「인사이드 아웃」처럼, 감정의 통제소가 있다면 그곳은 가을볕 아래 흩날리는 코스모스 꽃잎처럼 노란 감정 구슬들*이 우수수 쏟아지는 풍경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날의 감정을, 엄마의 슬픔이 닿아 나의 슬픔을 위로한 경험으로 이해한다.
인간은 절망 속에서 슬프고 상실 속에서 슬프다. 그리하여 슬픔에 지배된 감정의 상태를 “잠기다”라는 동사로 표현한다. 관용적 표현에 기대어 슬픔에 잠기는 자아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감정의 무게 추를 허리에 묶고 마음의 바닥까지 몸을 내리는 나의 모습이 얼핏 떠오른다. 슬픔에 잠긴다는 건 결국 심연의 자신과 대면하는 일이다.
슬픔의 본령은 자아에 대한 이해다. 그 깊숙한 대면 행위는 때로 고통을 동반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경험의 중요한 일부분이며, 우리는 슬픔을 통해 더 나은 인간으로 성숙할 수 있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인 존재지만*, 그렇기에 자신의 슬픔을 온전히 인식해야만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도 가능해진다.
다시, 엄마의 편지를 읽던 자리로 돌아가 이야기를 맺음 하고자 한다. 편지를 손에 쥔 순간, 내가 부재하여 빚어진 엄마의 슬픔이 나에게 닿는다. 나는 엄마의 슬픔을 통해, 내가 잊고 무너뜨린 감정의 섬*을 기억해 낸다. 편지를 읽으며 그곳으로 가는 다리를 이음으로써, 마음의 인대와 일상의 인대를 복원해 낸다.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소박한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엄마라는 이름의 작은 섬에서 불이 반짝이고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 노란 감정 구슬: 다시,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설정을 빌렸다. 영화에서 기쁨은 노란빛으로 표현된다.
*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인 존재: 신형철의 「당신의 지겨운 슬픔」에서 인용했다.
* 감정의 섬: 끝으로 빌린 「인사이드 아웃」의 설정이다. 특정한 방식의 기억이 축적되면, 감정의 섬 같은 자리가 생겨 자아에 영향을 준다.
(2024.9.4.)
※ 대구 글쓰기 모임 '마음씀'에서 '슬픔'을 주제로 적은 글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