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다짐
<조제약 복약 안내>
환자 정보: 박정호(만 38세/남)
…
보나링에이정(진토제): 멀미, 수술, 메니에르 증후군으로 인한 어지러움, 구역구토증상을 예방, 완화하는
써큐록신정(순환개선제, 뇌기능 개선제): 말초 순환장애나 어지러움, 이명 치료에 사용하는
약봉지에 쓰인 복약 안내서를 읽는다. 그리고 멀미, 어지러움, 구역과 구토 증상이 있었던 며칠 전 아침의 풍경에 대해 떠올린다. 흔한 출근병과는 결이 달랐던, 두통과 이상 감각이었다. 그것은 메니에르라는 낯선 이름처럼 생경한 고통이었다. 서거나 앉거나, 몸을 세우기만 하면 풍랑이 부는 바다처럼 바닥이 너울거려서 어지러움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너울거리는 풍경 속에서 난파하는 해선(海船)처럼 바닥에 엎어져 어쩔 줄 몰랐다. 서거나, 앉았을 때는 세상의 너울거림이 멎지 않아서 머리를 붙이고 누워 있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다.
병원은 붐볐다. 누인 머리를 일으켜 몸을 움직이고, 차를 움직인 과정에 대해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풍랑이 멎기를 기다리는 수부처럼 머릿속 기상(氣象)을 읽고 때를 맞춰 집을 나섰다. 뭐가 불편하세요. 의사가 물었다. 그게, 아침부터 좀 어지러웠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뱃멀미처럼, 혹은 좀 더 생생하게 묘사하자면 영화 인셉션의 한 장면처럼 눈앞의 풍경이 비현실적으로 너울거려요. 그런 설명을 전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환자와 의사 사이에서 통용되는 소통의 방식이 아니었다. 나는 간단하게 말을 줄였다. 다행히 의사는 어지럽다는 나의 증상과 표정만으로도 벌써부터 병을 가늠하여 적확한 검사를 하고 처방을 내렸다.
검사로는 확실치 않은데, ‘이석증(耳石症)’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의사가 말했다. 말하자면, 이석(耳石)이 이석(移席)했다는, 그리하여 전정 기관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 그의 소견이었다. 누우세요. 간호사가 말했다. 그러고는 지시에 따라 고개를 돌리고 몸을 굴렸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은 귓돌을 돌려놓으려면 그런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이 의사의 설명이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요. 나는 하찮은 동작에도 어지러워져 몸을 가누지 못하는 꼴이 민망하고 서러워서 하소연을 했다. 병이라는 게 다 그렇습니다. 간호사가 말했다. 그리고,
저라고 암인 줄 알았겠어요?
회전목마처럼 오르내리는 듯한 침대 위에서 내이(內耳)를 흔들고 간 그녀의 말소리를 듣고 어쩔 줄 몰랐다.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항암 치료를 견디고 이제는 예후를 지켜본다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는 위로도 공감도 할 수 없어 눈만 멀뚱거렸다. 한참을 이어가던 그녀의 이야기는 도돌이표가 그려진 악곡처럼 병이라는 게 다 그렇더라고요로 되돌아왔고, 나의 귓돌도 치환 치료가 잘 되어서 제자리를 찾았다고 했다. 전정 기관이 회복할 때까지 병실에 머무르고, 몸조리를 잘 하라는 당부를 남기고 그녀는 갔다.
살다 보면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나는 것처럼, 별의별 병(病)과 증(症)을 경험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발병의 양상도, 그래서 나타나는 증상도 전에 없이 다채롭고 다양해진다. 그것은 자연수명을 웃도는 기대수명을 살아가는 인간이 지불해야 할 일종의 세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 보니 서른을 지난 뒤로는 한두 해 걸러 꼭 한 번은 그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방식으로 크게 아팠다. 대상포진이 그랬고, 구안와사가 그랬다. 그에 비하면 사소하지만 귓돌이 떨어져 나간 오늘의 이석증도 그런 고통의 일종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늙고, 늙는 만큼 쇠약해지며, 하여 전보다 자주 아프고 많이 아프고 오래 아프고 생경하게 아플 것이다. 나는 자명한 이치가 오늘은 남 일 같지만, 내일은 내 일이 될 것 같아서 심란해졌다.
※ 해야 할 일, 삼가야 할 일
□ (할 일) 브란트-다로프 운동
□ (할 일) 충분한 수면
□ (할 일) 걷기 운동
□ (삼갈 일) 스트레스
□ (삼갈 일) 과격한 운동
□ (삼갈 일) 눈에 피로를 주는 활동
메모를 쓴다. 너울거림이 잦아든 잔잔한 소파에 앉아, 의사의 처방과 직접 찾아 본 정보들을 정리한다. 며칠이지만 재미를 붙인 러닝과 헬스를 할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쉽고, 모니터를 오래 볼 수 없으므로 글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이 난감하게 느껴진다. 이번 주의 주제는 ‘좋아하는 길’이었다. 대단치 못했던 인생 속에서 자랑할 만한 길은 무엇이 있었던가. 드문드문 소박하지만 광채를 잃지 않은 추억의 길들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그 길의 풍경은 추상의 사유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어서 사유로 이어지는 길, 그러니까 글을 통해서만 전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병이라는 게 다 그렇더라는 간호원의 결론처럼, 길에 대한 나의 결론도 도돌이표를 지난 악곡처럼 다시 ‘글’인듯싶다. 내가 좋아하는 길은 다름 아닌 ‘사유의 길’인가 보다. 그 길은 목적은 두지만 목적에 닿을지는 알 수 없는, 과정 속에서 맞닥뜨리는 수많은 상념과 추억의 행로다. 나는 오랫동안 혼자 걸은 글의 길을, 언젠가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지날 수 있게 될 미래를 감히 꿈꾼다. 엉성하지만 애써 고르고 쌓아 올린 미문(美文)과 비문(非文)들이 누군가의 마음에 들었으면 한다. 잠깐 켠 모니터의 글자들이 다시 너울거린다. 오늘 몫의 사유의 길은 여기까진가 보다. 나는 오래 걷기 위해, 오늘의 글을 닫는다.
(2025.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