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후의 나에게

내가 바라는 40대 후반의 나

by 박정호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어떤 세상을 살고 있습니까.

10년 후의 나에게 편지를 쓰기에 앞서, 10년 후의 나라는 이름을 가진 당신께 물음을 건네 봅니다. 미래의 당신이 내게 전해줄 대답이 무엇일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고 때문에 가장 마땅한 질문의 형식과 대답을 알지 못합니다. 저의 문답은 어쩔 수 없이 2025년의 저라는 실존 안에서 가능한 것이며, 그리하여 편지 형식의 이 글은 저의 기대와 바람을 투영한 ‘자문자답(自問自答)’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어떤 글을 쓰고 있는 당신을 상상합니다.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너무 부시지도 흐리지도 않은 전구색 조명 아래서 기계식 키보드를 두드리며 삶을 성찰하는 당신을 떠올립니다. 당신과 저 사이에 놓인 또 다른 우리가, 언젠가의 시점에 써 내린 책이 몇 권쯤 서재를 채우고 있다면, 하여 당신에게 독자와 소통할 수 있는 ‘지면(紙面)’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미래에 닿지 못하여 당신이 여전히 지면을 갖지 못한 필부의 삶을 살고 있더라도, 언젠가 당신의 글이 저와 당신 너머 더 먼 미래의 우리에게 지면을 허락하는 작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설령 그 어느 미래에도 정호라는 이름의 실존에게 작가라는 직함이 허락되지 않을지언정 아내와 딸 아이만은 우리의 글을 읽어주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생활의 부침이 힘들다 하여 글을 쓰는 일을 놓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중년을 지나는 아내와 저, 사춘기가 도래했을 아이의 모습을 상상합니다. 우리의 글을 지지할 유이한 독자, 가족이란 이름으로 우리의 삶을 응원할 두 여성, 아내와 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무람없이 생활을 공유하는 아내와 딸을 애정하는 마음과 친근하는 태도를 당신이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육아기만큼 아내나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는 없겠습니다만, 줄어드는 시간이 가족에 대한 소홀함으로 이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자기 딴에는 고단한 일과를 마치고 들강아지처럼 웅크리며 잠든 아이의 모습을, 그 아이를 재우기 위해 저와 함께 육아를 감당해 내는 아내의 노고를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10년 후 저의 모습을 알 수 없듯이 10년 후 아내와 아이의 모습이 상상되지 않습니다만, 현명하고 자애로운 가장이 되어 있다면 좋겠습니다. (하나 더. 갱년기와 사춘기를 지나는 두 여성의 투쟁을 감당하는 당신께 위로와 격려를, 10년 전에도 그 투쟁이 여전하였다는 사실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학교에서의 당신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10년 뒤의 학교는 어떤 모습일까요. 당신은 진학과 입시의 그늘에서 벗어나 있습니까. 당신의 교직 사회에서 화두(話頭)가 되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 세계는 민원과 교권 침해로부터 자유롭나요. 현직의 저를 괴롭히는 문제들은 여전한 고통으로 남아 있습니까. 당신의 수업은 평안합니까, 그리고 당신은 학생들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 많은 궁금증 가운데 제가 깊게 바라고 염려하는 것은 선생이란 직함을 갖고 살아갈 당신의 안녕(安寧)입니다. 지금과 같은 회의가 지속되더라도 그 회의가 열의와 쌍을 이루는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회의를 인정하고 열의를 잃지 않는 선생으로 살아가기를 바라 봅니다. 당신이 몸담고 있는 작은 세상 속에서 사회의 선순환을 담당하는 직업인으로서의 긍지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저는 당신이 잘 살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누리는 삶의 형식이 ‘잘’에 함의된 기대와 바람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말하자면 건강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당면한 문제로부터 삶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상태는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진표처럼 혹은 잠언집처럼 몸과 마음의 안녕을 물어보았을 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스스로의 답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었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소탈한 듯 느껴지는 저의 바람이 욕심이라면, 다만 당신이 ‘무사히’ 존재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그보다, 당신이 2025년의 저를 거쳐간 박정호라는 이름의 고유성으로 존재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당신 안에 지금의 내가 존재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에게 저의 말이 전해질 수 있을까요. 당신에게 제가 남아 있다면, 남아 있는 저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신천을 건너야 하는 퇴근길의 풍경을 떠올립니다. 우리의 삶은 진자 운동처럼 신천을 사이에 두고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학교와 집, 집과 학교. 그 무한한 듯 무료한 반복 속에서, 그러나 삶은 어떤 지향을 향해 흐르고 또 흘러가는 것입니다. 마치 출퇴근길 내려다보이는 신천, 강물처럼요. 저의 삶은, 그리고 우리의 삶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요. 당신은 생이라는 물줄기가 흘러가는 방향을 가늠하고 있는 걸까요.

서두에 밝힌 바, 무수한 질문 가운데 당신께 전할 수 있는 마땅한 답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 물음의 답이 구해질 그 모든 미래는 당신의 몫이며, 저는 2025년 늦봄의 어느 하루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늦은 봄 혹은 대구라서 찾아든 서두른 여름. 인생에서도 한 해에서도 오늘의 계절이 그렇게 느껴집니다. 제가 당신보다 뚜렷이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오늘이라는 현실입니다. 눈이 부실 만큼은 아닐지언정 청춘의 광휘가 미등(微燈)처럼 불을 밝힌 오늘의 나날들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생활을 감당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지만, 그래서 더욱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아마도 무렵이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푸릇하고 싱그러운 향을 간직한 시절일까 해서요.

세월은 거스를 수 없고 저의 삶은 가늠할 수 없는 당신의 삶으로 흘러갑니다. 제가 닿아 있을 당신이라는 삶의 풍경도 아름다웠으면 좋겠습니다. 노를 젓는 기분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닐까요. 묻다가 문득, 깨달아지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10년 후의 나, 당신께 부치는 저의 편지는 당신의 모습으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모습은 다름 아니라, 오늘의 제가 전하는 말과 행동에서 비롯한 것일 테니까요. 우리가 구분된 존재라면 결코 마주할 수 없는, 마주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없이 서글프지만 다행스러운 2035년 5월의 박정호 님. 10년 뒤 당신의 모습으로 완성될 오늘의 편지를 무사히 수신하기 바랍니다. 그때까지 늘 건강, 행복하면서요. 이만 줄입니다.

추신. 저의 삶이 당신으로 향하는 동안 지났을 모든 노고와 애환을 치하합니다. 박정호란 이름으로 살아온 삶의 무게를 누구보다 가깝게 이해하고 간직할 당신이, 오늘의 저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의 제가 최선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하여 후회나 원망의 모습으로 저를 떠올리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 2025.5.29. 박정호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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