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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그루 Aug 20. 2023

올드 잉글리쉬 쉽독 순향씨 작업기 <9>

소속사에 들고 유미를 내다.

Flee가 완성되고 당시 신곡이었던 유미 음원 작업에 들어갈 때였다.

유미는 포스트 펑크로 쓴곡이었는데, 인트로가 Funk 리듬으로 되어있는 곡이다.


성민이는 Funk를 상당히 잘 치고 식견도 깊어서인지, Funk적 리듬에 꽂혀 유미를 엄청나게 그 방향에 맞게 편곡하고 싶어했다.

그런 그의 의지는 내 의도대로 작업이 되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는 내 까칠한 성격에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나 밴드는 원래 길게 보는 것이고, 내 뜻대로만 운영하면 분명 반발을 살 것이라는 걱정 때문에 그의 의견을 수용한다. 당시 아버지의 투병생활도 내가 지치는 데에 한 몫했다. 


그러나 처음 데모의 느낌은 온데간데 없고 곡은 점점 미궁으로 빠진다. 이러던 와중에 공고를 보고 넣었던 루비레코드의 Lable Pick에 선정됐다.


아니 내가 검정치마가 있었던 소속사에 들어간다고?


전설의 <201>이 나왔던 루비레코드.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루비레코드가 한국 인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것은 사실이기에 가입을 고민하다가 가입하기로 결정한다.


이때 쯤 내가 느꼈던 멤버들은 나를 제외하고 상당히 들떠있었다. 우리 밴드의 노를 5명이 쥐고 있어서 한 곳에 가속도가 붙는 게 아니라 여전히 제자리에 있는데, 다들 열심히 나아가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 밴드는 아직도 음악 색도, 그걸 나타낼 수 있는 외적인 요소들도 단 하나도 갖춰있지 않았는데 말이다. 


세일즈일과 마케팅 일을 하면서 느낀 건 트렌드는 사실 생각보다 환상의 집합이다. 자기 줏대대로 사는 사람들이 결국 대중을 설득시키는 것인데, 트렌드라는 단어로 포장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밴드 내에서 줏대만 지켜봤자 그건 아집처럼 보여질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멤버들을 설득할 때 항상 나의 직업적 특성을 이용해 '이게 트렌드다'로 설득했었다.


아무튼 트렌드 이야기를 왜 했냐면, 키를 5명이 쥐고 있으니 이도저도 아닌 음악, 이도저도 아닌 아트워크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걸 하나로 모을 수 있었던 설득의 키가 '트렌드'였던 것이다. 사실 멤버들의 잘못은 없다. 내가 좀 더 결단이 있었다면 잘 따라와줬을 것이다.


내가 유일하게 내 뜻대로 할 수 있었던 유미 앨범아트.


시간은 흘러 소속사에서의 첫 싱글 유미를 발매하며 음악적으로는 성민이랑 싸우고, 음악 외적인 것으로는 소속사 분들을 설득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그들이었어도 내가 이상해보였을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똥존심에 현실은 시궁창인 내 말을 들을리가 없다. 유미 발매 이후로 멤버들과 사이도 안 좋아지고 실적도 안 나오고 말도 안따르니 소속사와의 사이도 소원해졌다. 그래도 우리를 뽑아준 사람들이고 멤버들도 나를 믿고 따라와줬는데, 미안한 마음도 매우 컸다. 차라리 결과라도 좋았으면 내가 누구 말이라도 따랐을텐데 유미는 우리가 여태까지 냈던 싱글 중 가장 처참한 성과를 냈다. 사실 나 아직도 유미 안 듣고 있다. 


근데 지금 돌이켜보면 유미가 처참히 망해서, 내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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