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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그루 Aug 20. 2023

올드 잉글리쉬 쉽독 순향씨 작업기 <10>

이제 본편 시작이다.

유미는 말아먹고, 조력자들과의 사이는 멀어지던 사면초가 상황...

어찌저찌 4월에는 공연이 많이 잡혀서 우리는 겉으로는 화려해보였으나 내부는 점점 곪아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4월 중순이었나, 소원해진 사이를 깨고 담당 피디님께 전화가 나왔다.


민규씨, 이제 순향씨 내셔야죠?


우리를 뽑아준 피디님은 어떻게 찾으셨는진 몰라도, 3년전 내 데모를 듣고 우리를 뽑아주셨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순향씨는 소위 '팝향씨' 단계였다. 아마 피디님께선 순향씨 초기의 오묘한 느낌을 잘 캐치하시고 그대로 곡이 나오는 줄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유미 이후로 멘탈은 나가 있고, 아버지는 투병 중이시고, 정규직에 붙었던 회사는 퇴사하고 정말 이리저리 시궁창이었던 상황이었지만 이번엔 한번 역전해보고 싶었다. 닥치는 대로 제안서를 쓰기 시작했다.


윤재안 작가의 포피스

순향씨는 곡을 쓸 때부터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로 하고 싶었다. 그래서 곡을 쓸 때부터 작가들을 디깅하고 있었는데, 나의 1지망은 윤재안 작가였다. 그의 무심한 듯 섬세한 그림체, 90-00년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세련된 작풍은 순향씨 뮤비에 매우 적합했다. 사실 2020년부터 컨택을 시도하려고 서일페도 다니고, 직접 디엠도 걸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 반응이 시큰둥해서 항상 마음속에 품기만 했었다.


무튼 윤재안 작가를 목표로 제안서를 쓰고 소속사에 보냈다. 소속사의 반응은?


잘 읽었습니다. 근데 죄송하지만 기획에 저희가 들어갈 곳이 없네요.
저희랑 같이 하고 싶은 건 맞으시죠?


맞는 말이다. A to Z를 내가 기획했는데, 사실 그건 광고계 종사해서 그런 습관이 몸에 배여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정중히 사과드리고 이번 싱글 한번만 우리가 해보고 싶은대로 도와주시면 안 되냐고 부탁드렸다. 의심 반 믿음 반으로 피디님께서는 승낙해주셨다. 피디님께서 정확히 보신 게 맞다. 사실 은연 중에 나도 소속사의 도움을 원치 않았던 것 같았다. 아니, 소속사 뿐만이 아니라 이번 순향씨 만큼은 그 누구의 도움도 원치 않았다. 어찌저찌 소속사 분들을 설득하고, 멤버들과 신촌 스타벅스에서 이야기한다. 내가 작성한 제안서와 함께. 


얘들아 이번 순향씨 내가 A to Z 다 해볼테니까 한번만 나 믿어봐주면 안 되냐?


욕 시원하게 먹을 각오로 눈 질끈 감고 있었는데,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아마 유미가 처참히 망하고, 소속사와의 의견 대립도 있어서 이게 오히려 구심점이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내심 우리 소속사가 우리를 통해서 다시 역전했었으면 좋겠다는 오만한 생각도 했었다. 과거의 영광을 우리가 되찾아주고 싶었었다.


그래 한 번 너 하고 싶은대로 한 번 해보자. 이렇게까지 준비해왔는데 우리가 뒤에서 많이 돕겠다.
당시 요런 느낌이었다.


나는 이 곡이 잘 될거라는 근거없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발매도 전에 이렇게 얘기하는게 내가 내 무덤 파는 행동이란 걸 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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