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음악
(1)
성인이 되고 혼자 지내면서, 가끔씩 아무런 약속 없이 집에서 하루 종일 누워있는 시간이 있다.
맑은 날씨, 밖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 조금씩 들어오는 경적소리 등은 적막한 방 안에서 점점 커지고 있다.
그때마다 침대에 빨려들어가듯한 고독감에 한동안 정복됐던 적이 있다.
누군가를 먼저 찾을 용기도 없었으면서
“왜 아무도 나를 찾지 않지?”
“내가 쌓아둔 관계는 부질없는 것인가?” 등의 의문이 떠오름과 동시에 실제 현상 대비 과장된 우울감이 부풀려지기 시작한다.
잘자 푼푼의 에피소드 중, 푼푼이 한 자취방에 혼자 살면서 자살할 날짜를 정해두고 하루종일 집에 있는 이야기가 있다.
고독하고 외로운 상황에서, 옆방에서 커플의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
이때의 푼푼의 고독감과 절망을 극대화 하는 연출이 나오는데, 나 또한 가끔 이러한 고독감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다 친구 재웅이의 카톡 한 줄
“민규 나와.”
이렇게 나는 너무나도 쉽게 감정에서 구조된다.
9번 트랙은 이렇게 쉽게 전환되는 감정에 대해서 다루고자 했다. 왜 죽음까지 근접한 우울감도, 가끔은 일기와 친구의 안부 전화 하나로 전환되는 것일까?
(2)
주위의 나에 대한 시선은 부지런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 모습과 다르게 나는 진짜 게으르다.
이 게으름을 극복하기 위해 일을 많이 벌려두고 처리하는 편이다.
하지만 밴드 작업은 마감이 없는 일이기에, 진짜 게으르게 한다.
매일매일 컴퓨터에 앉아서 1시간이라도 작업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악기 연습을 절대 하지 않는다.
이러한 배경에서 9번 트랙은 평소보다 정말 더 게으르게 만들었다.
악기도 연주하기 귀찮아서 전부 루프를 돌려버리고, 보컬도 그냥 처음부터 루프로 돌려버렸다.
귀찮아서 루프를 돌려버렸는데, 이게 또 반복되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가끔 의도와 다르게 무언가 생겨날 때가 있다. 올드보이 마지막 결투 장면도 그렇게 만들어졌대)
하지만 당연히 지루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나름 내 음악을 계속 듣다보니, 생쌀도 계속 씹으면 단 맛 난다고. 꽤 괜찮게 들리는 것이다.
이에 하루는 친구들에게 들려줬는데,
"이거 현대 순수 음악이냐? 이 새끼, 음악으로 나를 고문하다니.
드디어 방향을 바꿨구나!"
라는 반응이 왔다.
여담이지만 이 시즌이 정규앨범 프로토타입 작업 즈음이었는데, 이때부터 내 음악을 너무 많이 듣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나는 내가 듣기 좋은 것을 만들고 싶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곡을 쓰기 전에 있었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이기 때문이다.
무튼 해당 피드백을 받고, “그래, 그럼 기타랑 보컬은 루프 돌려버리고, 다른 것들에서 승부를 보자”는 목표가 생겼다.
이 목표가 0편에서 언급한, 제한된 환경에서의 아이디어를 키우는 발판이 되었다.
(3)
최대한 지루함을 덜기 위해 사용한 전략은 자연스러운 템포 변환이었다.
해당 곡에서는 루프되는 나일론 기타가 있는데, 이 나일론 기타를 미묘하게 6/8박자에도 맞고, 4/4박자에도 맞게 배치하여 리스너의 귀를 속이고자 했다.
고로 중간에 갑자기 6/8->4/4로 바뀌는 순간이 있는데, 아마 이를 눈치챌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루프 사운드인 만큼 드럼에 신경을 많이 썼다. 언제든지 템포가 변환돼도 어색하지 않도록 연결고리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작업했다.
결과가 당연히 더 중요하지만, 과정은 이랬다는 것만 언급하고 싶다.
이외에 추가적인 사운드 배치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으나, 또 감상의 범위를 제한하는 것 같아 글을 줄이고자 한다.
(4) 도움을 받은 음악들
선결 - 마음을 둘곳
Deer Hunter - Cover Me (Slowly)
Zzzaam - 빛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