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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그루 Jan 07. 2023

에세이를 가장한 일기 <2023.01.07>

27살을 맞이하며

12월 어느 날이었다.

영화 음악의 믹싱 작업 회의를 하러, 어느 대학교 교수님의 작업실에 감독님과 함께 방문했다.

고가의 음향 장비들을 들어볼 기회여서, 음악을 한 곡 고르는 순간이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Smashing Pumpkins의 1979를 들었다. 


그 교수님께서는 요즘도 이런 음악을 듣는 젊은이가 있냐는 질문과 함께 90년대 음악을 비판하기 시작하셨다.


너바나나 라디오헤드, 스매싱 펌킨스 같은 90년대 음악은 믹싱도 엉망이고 자기고뇌에 빠진 음악이라 교수님께선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이른 점심, 보문동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눈이 솜처럼 쌓여있었다.

입김을 후후 뱉으며, 약간의 감상에도 젖을 틈도 없이 집에 돌아가 할 일을 이어갔다.


시간은 흘러 나는 공공 정책을 홍보하는 광고회사에 인턴으로 다니게 되었다. 

'공공의 적'이 되겠다는 마음과 함께 입사하였지만, 밴드를 굴릴 시간도 부족해 그저 기획에 관련된 일을 하며 급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매일 아침 텅 빈 광흥창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도 신곡 발매 준비가 바빠 대전에 내려가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신경쓸 틈도 없이 밴드 광고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저 관성으로 일에 떠밀려 사는 일상은 나쁘지 않다. 나처럼 조금이라도 가만히 방치하면 수많은 생각에 잠식되는 인간은 일이 도피처이다. 새해가 오고 있음에도, 연인과의 통화로만 그것을 가늠하며 나는 컴퓨터 앞에 있었다.


서울에서 대전을 내려가며 새해 첫 곡으로 라디오헤드의 iron lung을 들었다. 

20대 초반에는 브로콜리 너마저의 음악을 듣기만해도 눈물이 엄청 흘렀는데

이젠 '졸업'할 때가 찾아와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집에 오자마자 나는 새로운 독립영화의 음악 작업을 시작하고 새해의 시간은 또 흘렀다.

3일이 되었다. 올드 잉글리쉬 쉽독의 신곡 <Flee!>가 발매되고, 인스타 광고를 집행하며 그 결과를 바라보던 와중이었다.


어머니에게 연락이 왔다. 최근 아버지가 건강이 안좋아지셔서 건강검진을 12월 중에 해보셨는데 그 결과가 나왔다는 연락이었다.



오늘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는데, 네 아버지 폐암인 것 같다.

"⋯."

"초기라서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 마렴. 정밀검사까지 기다려보자"

"네⋯."


회사에서 무언가 머리 끝까지 올라왔지만 참을 수 있었다.


나는 한 평생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에고이스트 같은 성향이 있으셨고, 항상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에 익숙하신 분이었다.


나의 창작물에서 풍기는 결핍의 냄새는 오로지 아버지의 덕이다.

누구나 모난 점은 있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성격의 모난점은 거의 아버지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또한 이제는 응원해주시지만, 음악을 하는 것조차 반대하셔서 23년을 서먹하게 지냈던 것 같다.

하지만 또 역설적으로 아버지의 경제력 덕분에 나는 내 인생에만 신경쓸 수 있는 감사한 20대를 보냈고,

실패를 지탱해줄 수 있는 아버지가 있었기에 비로소 어른이 되어갈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쇠약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구가 자전한다는 사실보다 그 명제 자체를 떠올릴 수 없었던 것이다.


4일이 되었다. 밴드 친구들과 찾아와준 지인들을 위해서 아무 내색도 낼 수 없었다.

그러다 집에 가는 길에 조심스럽게 연인에게만 이 사실을 알렸다.

전달하는 것조차 미안했다. 이런 얘기를 하면 나와 아버지를 걱정하느라 나만큼 마음 고생을 할 사람인 것을 알기에.


연인은 그저 들어주었다. 그래서 고마웠다.


1월 5일이 왔다.
새벽에 내가 정말 아끼는 후배에게 잘 지내냐고 연락이 왔다.
후배는 최근 힘든 일로 몇 개월간 잠적하며 살고 있었다.

후배에 잘 지내냐는 연락에 간단히 내 최근에 있던 일만 전했다.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후배는 울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이기적이게 연락 한 번 안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후배의 이야기를 덤덤히 들어주었다. 후배는 그동안 믿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 또한 전했다.

나도 선배들에게 사랑받았던 경험으로, 나중에 조금 모자라더라도 너가 믿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믿어주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자식처럼 아꼈던 후배의 눈물, 아버지의 쇠약, 연인에게 나약한 모습이 담긴 내 얼굴이 거울 속에 보였다.

거울을 보고 운 것은 4년만이었다.


20대 후반으로 들어서며 자기 고뇌가 사라졌다는 것은

강해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더 이상 내가 나를 돌아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1월 6일

8시에 보문역으로 나와 광흥창으로 향하는 길엔

다시 예전처럼 끓어오르는 것이 있었다.


팀장님에게 아버지 암 조직검사에 함께한다고 휴가를 부탁드렸다.

팀장님은 5초정도 생각을 하시다가 어깨를 두드려주시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해주셨다.


아버지는 이겨내실 거다. 그리고 이 지점은 나에게 삶에 대해 다시 한번 고찰하게 해주었다.

자기 고뇌가 과하면 자기 자신을 가둘 수도 있겠지만,

직장생활을 하며 느낀 건 자기 고뇌 없이는 흘러가는 시간을 멈출 수가 없다.


두서 없는 말들이다. 하지만 무언가 써내려가며 마음을 쓸어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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