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발모리 백수전시 후기
우리는 '리더'라는 단어에 특정한 이미지를 떠올린다.
결정권을 가진 사람,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 누구보다 앞서서 이끄는 사람.
그리고 그런 리더는, 늘 흔들림 없이 단단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리더십은 그와는 조금 달랐다.
2개월 간 커뮤니티 멤버들과 함께 <단발모리의 백수 전시>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그 과정에서 새롭게 느낀 리더십과 팀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이 전시는 커뮤니티 매니저로 일했던 단발모리님이 퇴사 후 겪은 번아웃과 무기력, 그리고 그 시간을 지나며 회복해나간 과정을 담았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백수의 삶도 충분히 의미 있고 괜찮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나는 오랫동안 단발님의 콘텐츠를 지켜 보며 그녀가 지향하는 감정과 언어, 가치들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시 컨셉을 고민하고, 실제 공간 섭외하는 과정도 자연스럽게 내가 주도적으로 진행했었다.
프로젝트 PM을 맡다보니 초반에는 자연스레 내가 모든 걸 매니징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따라 붙었다. 회의 주제를 정하고, 흐름을 조율하고, 회의록을 공유하고, 준비물과 진행상황을 엑셀로 정리하며 나는 익숙한 '효율모드’로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딘가 조금씩 어긋나는 감각이 생겨났다. 이 프로젝트는 우리가 하던 다른 일들과는 결이 달랐기 때문이다.
단발모리님은 이번 전시의 주인공이자, 동시에 기획자였다. 전시의 핵심 메시지를 설계하고 흐름을 이끌어가는 리더의 역할까지 자연스레 맡게 되었고 그렇기에 당연히 부담도, 감정 소모도 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의 매니징 방식이 그녀에게 조금씩 무게로 느껴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때쯤, 단발모리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 이번 전시를 일처럼 딱딱하게 준비하지 않고, 놀이처럼 설레는 시간이 되길 바랐어요.
효율과 성과보다, 과정이 즐거운 일이었으면 좋겠어요."
이 말을 듣고 나는 '효율모드'를 끌 수 있었다. 회사에서 일하는 동료라기 보다는 학교 동아리 방에서 친구들 만난다는 느낌으로 멤버들을 만났다.
직접 글씨 쓰고, 그리고, 가위로 오리고, 붙이고..
그렇게 우리는 며칠 동안 단발님 집에 옹기종기 모여 말 그대로 ‘가내 수공업’을 했다.
문득 이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 자체도 단발모리님의 백수생활을 응원하는 전시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수의 삶'을 ‘비생산적’으로 보는 것처럼 우리 프로젝트의 진행 방식도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끊임 없이 효율과 생산성을 강요하는 사회 속에서 무언가를 ‘잘’ 해내는 것보다, 어떻게 ‘함께’ 해내는지가 더 중요해지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만남도 더 캐주얼해졌고, 대화도 더 친밀해졌다. 멤버들이 자연스럽게 각자의 방식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질도, 역할도, 언어와 행동방식도 다 달랐지만, 그 다양성이 오히려 프로젝트를 유연하게 만들어주었다.
한 문제를 가지고도 서로 다른 관점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는데, 실례로 전시 2일차에 비 소식이 있었다.
❤️리더 단발: "헐 낼 비온대요 ㅠㅠ"
�비타민 몰루: "단발님, 괜찮아요! 강수 확률 보면 오다 금방 그칠 수도 있고 걱정 마세요!"
(단발의 멘탈을 케어해준다)
�영업왕 라라: "비와도 분위기 좋을 걸요? 안되면 현장에서 모객하죠 뭐 ㅎㅎ"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금방 적응해 되는 방법을 찾는다)
�PM 송삼: "내일 비가 온다고..? 그럼 준비해야할 게 우산꽂이랑 발매트, 대걸레…"
(만일의 상황에 필요한 것들을 미리 준비한다)
이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누가 리더인가’보다, ‘어떻게 리더처럼 행동하는가’가 중요하구나.
리더십은 더 이상 누군가로 부여 받은, 특정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태도와 책임감을 가진 누구나,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팀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한 모두가 리더였다.
전시는 생각보다 성공적으로 끝났다. 2일 동안 150명이 넘는 사람들이 방문했고, 많은 사람들이 "나도 쉼이 필요했다", "백수라는 단어가 더 이상 부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라는 위로와 공감을 남겨주었다.
이렇게 전시가 마무리 된 뒤, 단발모리님은 뒷풀이 자리에서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빈틈이 많은 리더였지만 멤버들이 잘 도와줘서 너무 고마웠어요!
나는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래서 팀이 존재하는 거구나.
팀은 완벽한 리더 한 명이 모든 걸 이끌어가는 구조가 아니다. 누군가의 빈틈이 드러날 때, 다른 누군가의 조각이 그것을 메우며 하나의 그림이 완성된다.
모든 걸 컨트롤하려 하기보다, 가끔은 한 발 물러서서 팀원들이 자기 방식대로 빛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게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단발님이 리더로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과정에서 난 오히려 팀의 본질을 깨닫게 되었다.
빈틈은 단점이 아니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여지가 아닐까? 그 비어 있는 공간 덕분에 우리는 서로 더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함께 채워나가는 그 순간들이, 완벽함보다 훨씬 더 단단한 팀을 만든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