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만나다] - 무대 뒤까지 챙겨라
"구원장학재단 황필상씨 사진 관련해 연락드립니다."
2018년 12월 30일 오전 중 받은 수십 통의 이메일 제목 중 하나다. 발제 보고가 바쁜 시간이라 열어보지 않았다. 기자의 편지함엔 온갖 홍보, 항의, 보도자료가 매일 쏟아진다. 때문에 열어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메일이 훨씬 많다.
점심을 먹고 와서 다시 눈에 띄는 메일 제목. 황필상이 누구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메일을 열어봤다. 2017년 내가 쓴 기사에서 사용한 사진의 원본 파일을 받을 수 있는지 정중하게 묻는 내용이었다.
'활짝 웃고 계신 사진', '가족으로서 너무 귀한 사진', '건강이 안 좋아지셨는데…'.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짐작이 되면서, 황씨의 사진을 찍던 순간이 떠올랐다. 아주 생생하게.
황필상 구원장학재단 이사장. 그의 이름은 몰라도 그가 겪은 일은 한 번쯤 들어봤을 수 있다. 평생 모은 195억원을 장학재단에 기부했다가 140억원의 '세금 폭탄'을 맞았고, 못 받아들이겠다고 길고 긴 소송을 치르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황 이사장은 1947년 서울 청계천 인근 판자촌에서 태어났다. 생활정보지 수원교차로를 설립해 자수성가하자 '사람 농사'를 짓고 싶었다고 한다. 2002년 모교인 아주대에 기부를 하겠다고 했다. 수원교차로 주식 지분 90%(당시 평가액 180억원)와 현금 15억원이었다.
아주대 측이 직접 증여를 받는 건 곤란하다고 해서 대학과 공동으로 '황필상 아주 장학재단(현 구원장학재단)'을 세웠다. 2008년까지 6년 동안 학생 733명이 41억원이 넘는 장학금을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세무서에서 세금 140억원을 내라고 했다. 100억원의 증여세와 5년 동안 내지 않은 가산세 40억원을 합친 액수다. 장학재단에 재산을 기부한 것이 편법으로 상속을 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본 것이다. 장학재단의 재산과 계좌가 압류됐다.
황 이사장은 이듬해 세금 부과를 취소해 달라고 소송을 냈다. 2010년 1심에서 이기자 "이제 다 해결됐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듬해 2심 재판부는 "경제력을 가족 등에게 승계할 위험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면서 세무서의 손을 들어줬다.
내가 황 이사장을 만난 건 그로부터 6년 뒤, 대법원 판결이 나오던 날이었다. 2017년 4월 20일 아침, 중앙일보 법조팀장이던 L선배는 나에게 과제를 내렸다. "황필상 이사장의 기자회견이 끝나면 '적군'(다른 기자들)을 따돌리고 따로 만나서 무조건 단독 인터뷰를 해라. 2면을 통째로 비워놓을 테니까. 놓치면 펑크 나는 거다."
이날 오후, 대법원 법정에서 그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원심을 파기하고…" 8년 동안의 긴 소송에서 이기는 순간, 그의 입 꼬리가 가볍게 올라갔다가 곧 내려왔다. 담담한 얼굴이었다. 간신히 얻어낸 결과에 부정이라도 탈까 조심하는 것 같았다. 선고 뒤 기자 회견에서 질문이 쏟아질 때도 "더 이상 앞길이 안 보일 때 나에게 큰 힘이 돼 준 의인들"이라며 변호인단을 치켜세울 뿐이었다.
방송사 인터뷰까지 모두 마치고 '적군'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나도 철수하는 척 하면서 눈치를 보다가 주차장으로 가는 그를 후다닥 쫓았다. 그가 향한 곳은 법원 안 흡연 구역.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뱉으며 비로소 활짝 그가 웃었다. 놓칠 수 없어 급히 스마트폰을 꺼내 찍었다.
"다행입니다. 많이 힘드셨죠?"
"너무 오래 걸렸어. 이번 일로 400살 도사가 된 것 같아."
그가 비로소 속내를 털어놓았다. "처음엔 속 무지하게 많이 썩었어. 내가 왜 기부를 해서 범죄자로 몰리고. 가족들에게도 미안해서 후회를 많이 했어. 그 뒤론 체념했지. 이 일에만 몰두하면 죽을까 봐. 내가 만학도로 돈도 없이 공부할 때 배운 노하우가 있지. 힘들수록 힘을 빼고 버티는 거야."
그는 아직도 사람 농사에 대한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고 했다. "동량지재(棟梁之材)를 많이 길러 외국에 유학도 보내고 씨를 잘 뿌리고 있었는데…"하면서 많이 아쉬워했다. 차를 타고 떠나기 전 15분간 나눈 대화에서 그의 진심이 전달됐다. "이제 500살 먹었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열심히 키워보리다."
그가 떠나자 법조팀장 L선배에게 전화했다. "따로 만나서 확실하게 들었어요. 까먹기 전에 빨리 쓸 게요." 어떤 내용인지 자세히 보고도 안 했는데 L선배도 내 목소리에서 확신을 느꼈는지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그러라 했다. 검찰청 기자실에서 기사를 써서 보냈다. 제목은 <“사람 농사가 범죄 될 뻔해 … 제2 잡스 다시 키워보리다”>.
황 이사장의 가족들이 찾는 건 바로 이날 찍은 사진이었다. 이메일로 사진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답장이 왔다. "아버지께서 오늘 새벽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모습이 담긴 사진으로 영정 사진을 쓸 수 있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출근을 하려고 샤워를 하다가 왈칵 울음이 났다. '500살까지' 사람농사를 짓겠다던 분이 이렇게 허망하게 가시다니 속이 상했다. 하루에 2만 보씩 걸을 정도로 건강했던 고인은 소송을 치르면서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졌다고 한다. 고인은 아주대의료원에 자신의 주검을 기증하고 떠났다. 마지막 나눔이었다.
2017년 12월 국회에선 선의의 기부자가 세금 걱정 없이 주식을 사회에 내놓을 수 있도록 하는 일명 '황필상법'(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법정 투쟁으로 사람농사의 씨 뿌리기를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지만, 남들이 사람 농사를 짓기 쉽도록 토양을 다지고 간 것이다.
2018년의 마지막 날, 퇴근길에 그의 빈소를 찾았다.
'아, 정말 내가 찍은 사진이 영정 사진으로 걸려있구나.'
담배 연기 속에서 웃고 있는 그에게 인사를 드렸다. 사모님께서 손을 꼭 잡아주셨다. "그 양반 그래도 이겨서 후회는 없이 갔어. 정말로." 고인께서 내가 쓴 기사를 읽고 또 읽고, 복사해서 주변에 나눠주기도 했다고 한다. 고맙고 미안했다.
"자서전은 다 쓰셨나요?" 내 물음에 유족들의 눈이 동그랗게 됐다. 고인의 사진을 찍은 날 그는 "두 딸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가족들 모르게 자서전을 쓸 생각"이라고 했다.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을 몰래 준비하는 아버지처럼 들뜬 표정이었다. 두 따님은 울음과 웃음이 섞인 얼굴로 "어서 아버지 노트북을 열어 봐야겠다"고 했다.
또 한 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고인의 따님이었다. "그날 밤, 아버지께서 남기신 마지막 유서를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덕분에 영결식에서 아버지 유서로 모두 깊은 감동과 위로를 받았습니다."
유족의 허락을 받아 고인의 뜻을 몇 줄 함께 나눠본다.
"주어진 일에 감사하면서 너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라. 그리고 여력이 있거든 인정을 베풀어라! 남을 위해서도 살아라! 내 이웃이여! 사랑합시다. 줍시다. 100년 인생도 순간이라오!"
이 내용은 책 <기레기를 피하는 53가지 방법>에 담긴 글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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