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딸기 케이크 위에 두 개의 숫자가 올려졌다. 잠시 후 숫자 위에 일렁이는 불이 하나씩 자리를 잡았다.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오고 박수가 짝짝짝 하고 처짐과 동시에 숫자 1과 3의 초에 불이 꺼졌다. 하얀이는 플라스틱 나이프를 손에 잡고 함께 케이크를 먹기 위해 조금은 엉성한 솜씨로 조각을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냥 귀여운 듯 바라보고 있는 손하다.
“누가 태명을 딸기라 지어서, 애가 매년 딸기 케이크만 찾네.”
도인은 하얀이의 옷소매를 걷어주며, 누군가를 향해 들으라는 듯 놀리는 말투로 손하를 바라봤다.
“여보, 또야?”
나지막한 손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듯 이내 하얀이의 귀에 손을 작게 포개곤 ‘아빠가 나중에 다 말해줄게.’라고 속삭이다 결국 시원하게 등짝을 얻어맞는 도인이다.
한참을 그렇게 장난치다 케이크가 미쳐 다 조각나기 전 웃고 있던 손하의 표정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도인은 식탁 위에 놓인 티슈를 돌돌 말아 하얀의 코에 꽂아주곤 ‘생일날 액땜 제대로 하네’라며 웃어 보였다. 하얀도 웃는 아빠를 보며 마냥 해맑게 따라 웃어보았다. 자리를 마무리하고 최근 부쩍 기온이 떨어진 탓인지 아까 본 코피 탓인지 몸이 으슬으슬 떨려와 보리차 물을 올려놨다. 하얀이는 남편과 잠자리에 들기 위해 방에 들어갔고, 손하는 담요 하나를 두르고 서재로 들어갔다. 가만히 서재를 둘러보자 서재에 있는 하얀이의 사진첩을 발견했다. 손을 뻗어 사진첩을 꺼낸 후 천천히 추억을 회상하며 책장을 넘겼다. 언제 따라온 건지 맥스도 손하의 옆에 엎드려 곁을 지켰다. 사진에는 맥스의 모습도 가득했다. 하얀이와 동갑인 맥스도 어느덧 13살이 되었다. 3개월 때에 비하면 촐랑이는 몸짓은 줄었지만 여전히 듬직하고 소중했다. 사진을 넘기다 보니 문득 그날의 여성이 떠올랐다. 10년 넘게 열지 않았던 서랍이 바로 손하의 왼쪽 허벅다리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 수십 번 서랍장의 문고리를 잡았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끝으로 고리를 잡아 끄는 순간 그 안은 손하의 업무 노트들이 가득 차 있었다. 노트를 모조리 꺼내자 그제야 그날의 수첩이 보였다. 얼추 이 정도를 읽었던 것 같다는 생각으로 페이지를 대략 잡아 넘겼다. 14세 중학교 입학 이야기가 보였다. 13년 전 손하가 마지막으로 본 페이지였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서늘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다음 페이지를 향해 종이가 마찰되어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서재에 울렸다.
우리에겐 정우의 15살 생일이 마지막이었다. 더 이상의 생일을 챙기지 못했다. 정우의 중학교 졸업식도 가지 못했다. 이 노트도 20살의 정우에게 줄 수가 없다. 15살 생일 아침 정우는 그냥 그렇게 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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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정우 엄마입니다. 이 글을 몇 년이 흐른 후 보게 될지는 모르지만 질병에 대해 몇 자 적어볼까 합니다. 아이가 죽고 우연히 같은 질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분의 아이도 15세에 자연사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증후군과 연관이 되어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총 3명의 여성에게 발병했다는 건 알고 계시죠? 다른 한 분도 이전에 만난 적이 있습니다. 수십 년을 증후군을 가진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피부가 메마르고, 앙상한 뼈의 촉감이 느껴질 정도로요. 아마도 증후군의 증상 중 하나인 식이섭취 불가 항목 때문이겠지요. 미혼의 여성이었으며, 아이를 낳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저희 세명은 모두 정체를 감추고 사라졌습니다. 저 또한 한국을 떠나 43살 이전의 모습으로 여전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는 게 힘과 모르는 게 약 중 어느 것이 덜 슬픈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의 죽음을 미리 알고 겪느냐 마느냐는 슬픔의 중량을 무시하기 때문이죠. 단지 끝을 알고 사랑을 시작하는 것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보다 생명이 짧은 보통의 동물을 사랑하듯이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내 자식이, 그리고 나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날 것임을요. 세상은 그렇더라고요. 끝을 모르는 대가로 삶을 즐길 줄 아는 여유로움을 주고 회환의 감정을 남깁니다. 끝이 있는 15년간—끝이 없는 사랑을 아이에게 주길 바랍니다.
본인의 이름조차 적혀있지 않은 여성의 짧고 굵은 편지는 수첩의 마지막 장을 장식했다. 10년간 잊고 있었던, 잊으려 노력했었던, 또 정말 잊어버렸던 사실을 마주했다. 생각 외로 손하의 반응은 차분하고 덤덤했다. 아마 무의식의 진실이 하얀이를 향해 매일을 마지막인 듯 끝없이 사랑해 준 덕이 아닐까 싶었다. 해당 페이지를 덮지 못한 채 생각에 잠겼다. 하얀이에게 남은 시간이 단 2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시간이 조금 필요했지만—또 시간이 없었다. 열린 문 뒤로 경쾌하고 빠른 증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주전자에 보리차를 올려놓은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어깨에 두른 담요를 빠른 속도로 의자 아래로 휙휙 하고 팽개치곤—주방을 향해 둔탁한 발자국 소리를 내며 달렸다. 서둘러 주방의 상황을 정리하곤 식탁에 앉아 마음을 가라앉히기로 했다. 컵에든 따뜻했던 보리차가 어느덧 바닥을 보일 때쯤 손하는 싱크대로 컵을 올려두곤 수첩의 존재를 잠시 잊은 듯 잠에 들 준비를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의 문이 닫히는 순간에 맞춰 아들 하얀이의 방문이 열렸고, 잠에서 막 깨어난 도인이 서재에서 나오는 하얀이를 발견했다.
“하얀이 거기서 뭐해?”
“이것 봐라, 나 어릴 때.”
웃으며 손으로 자신의 100일 잔치 사진을 들고 흔들어 보였다. 도인은 늦었다며 빨리 자라는 말과 함께 방에 들어가는 하얀의 모습을 바라봤다. 하얀이가 방에 들어간 것을 확인한 도인은 서재에 누워있는 맥스를 데리고 나오기 위해 안을 향해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닥에 떨어진 수첩을 발견했다.
수첩의 내용을 모두 읽은 후 손하와 셀 수 없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가끔은 다툼으로 번지기도 했으며, 쉽사리 믿지 못하는 이 상황을 서로 이해하기 위해 몇 날 며칠 여러 설명이 필요했다. 아내 손하도 이젠 끝내 자신의 아들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고작 2년이었다.
***
“오늘은 새로운 학생이 전학을 왔어요. 자, 인사해 볼까?”
초등학교 6학년, 곧 중학교로 올라가는 막바지 가을의 끝 전학을 온 여학생에게 괜히 시선이 갔다. 가을의 햇볕이 따가운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여학생이 서있는 곳에만 유달리 따사로운 햇빛이 투과되었다. 마치 주인공에게 쏘는 스포트라이트처럼 말이다. 선생님의 말에 여학생은 찡긋하고 웃어 보이며 고개를 기울이자—하나로 가지런히 묶은 긴 머리가 뚝하고 떨어져 양옆으로 흔들렸다.
“박하린이라고 해.”
하린이와의 짧은 초등학교생활을 마치고 우연히 같은 중학교로…
“하얀아, 같이 점심 먹자.”
또 같은 반 옆자리가 되어 여전히 밝은 분위기를 풍기며 하얀이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하린이의 이미지가 모두에게 친절한 편은 아니었다. 왜인지 하얀이게만 유독 미소를 지어 보였고—또 강했다.
“어? 또 코피 난다.”
하린이는 익숙한 듯 자신의 책상 위에 있는 휴지를 돌돌 말아 옆자리 하얀이에게 건넸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휴지를 챙겨 받는 순간 순식간에 여러 명의 웅성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황 파악을 위해 뒤를 도는 순간 하얀이의 고개가 정체 모를 주먹으로 내리쳐져 꼬꾸라졌다. 주변은 온통 여학생들의 경기 일으키는 비명 소음이 들렸고, 그 후로 들려오는 음성은 이러했다.
“네가 그 코피라며? 지금도 흘리고 있네 이 새끼.”
2학년으로 보이는 남학생 3명이 보였다. 그중 숨을 들었다 놨다 하는 특이한 호흡을 쓰며 웃는 한 명이 하얀과 눈이 마주치자—웃음을 멈추며 금방이라도 다시금 주먹이 날아올 듯 눈썹을 치켜올리며 다가왔다.
“백하얀이야.”
하얀이는 그런 상황에서 그 누구보다 인자하고 햇살을 의인화 한 모습으로 통성명했다. 그는 알았을 거다. 그 말은 주먹을 더욱 촉진시킨다는 걸. 역시나 심기를 건드린 죄로 두 번째 주먹이 날라 오기 직전 무언가 빠직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하얀이의 눈앞에 특이한 호흡의 남학생은 자신의 얼굴 전면 부를 양손으로 부여잡고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교실에 있는 모든 학생들은 남학생이 아닌 다른 곳에 시선이 꽂혀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은 의자를 양손으로 잡고 있는 하린이가 있었다. 하린이는 매번 이런 식이었다. 하얀이가 중학교에서 놀림거리가 되어 따돌림을 당할 때면 어디선가 나타나 경고가 아닌 박살을 내버리는 아이였다.
“반말해서 화가 났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터진 입술을 손으로 만졌다. 양호실에 가자며 손을 잡아 끄는 것 역시 하린이었다.
“너 정말 순진하구나?”
“응?”
“마음에 들어.”
양동이에 물을 받아 하얀에게 부어버리는 날에는 그 아이의 모든 교재와 물건을 가져와 찢고 부셔 똑같이 양동이에 담가버렸다. 한 번은 하얀이의 체육시간 잠시 남겨진 교복을 모두 가위로 찢어놓은 일이 있었는데 그날 그 아이의 반에 자고 있는 여학생의 머리를 가위로 잘라버렸다. 물론 범인이 남학생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말이다. 매번 무지막지한 행동으로 하린이의 부모님은 간간이 학교에 출석을 하셨다. 오늘도 그날인 것 같았다.
“하린이 아버님….”
“죄송합니다.”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교장선생님에게 정수리만을 보였다.
“이게 도대체 몇 번째입니까, 하얀이랑 친척 사이예요?”
“아닙니다.”
“아버님, 학부모의 역할이 큽니다.”
“네 죄송합니다. 제가 잘 교육하겠습니다."
교장선생님에게 대답을 하는 것인지 바닥과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덕에 하린이 아빠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다음번에는 학폭위가 열릴 수 있어요.”
“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습관성 ‘네’로 순간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네요? 지금 또 그러겠다는 건가요.”
가뜩이나 없는 머리칼을 휘날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교장의 흥분한 감정은 몇 분간 쉽사리 잠잠해지지 않았다. 살짝 열린 교장실 틈으로 해당 장면을 지켜보던 하얀이는 누군가 자신의 팔을 끄는 덕에 몸이 반대로 돌아갔다.
“거기서 뭐해?”
“아… 너희 아버지 오셨어.”
“나 때문에 고생 많이 하네.”
말은 바로 하라는 듯 하얀이에게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네가 아니라, 나 때문이지.”
더 이상 이 주제에 관심이 없다는 듯 다른 주제로 화제를 돌렸다.
“밖에 벚꽃 예쁘더라 같이 구경 가자.”
하굣길에 핀 벚꽃길이 선 분홍빛으로 가득 물들었다. 둘은 같이 한 발자국씩 걸으며 벚꽃 구경을 했다. 때마침 부는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 잎이 둘을 향해 비 오듯 쏟아졌다. 그 모습은 마치 작년 전학 날 처음으로 인사하던 때를 연상시켰다.
“너무 이쁘다 그치?”
“팔에 낀 두루마리 휴지만 빼면.”
하얀이의 코피가 언제 날지 몰라 상시 팔뚝 사이에 끼고 다니는 휴지가 고마우면서 귀여웠다. 귀여워하는 모습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떨구자 하린이의 신발 끈이 본인 자아가 달린 듯 자유자재로 펄렁이고 있었다. 손으로 하린이를 잡아 잠시 멈춰두곤 풀린 신발 끈을 정성스레 묶어줬다.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그녀는 까치발을 세우곤 하얀이를 향해 볼 맞춤을 해왔다.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겠지만 입을 뗌과 동시에 하얀이의 코에서는 코피가 흘러나왔다.
“이건 나한테 반해서 흘린 것 같아 하얀아.”
하얀이는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건네주는 휴지로 코를 무심히 톡톡 닦아냈다. 그리고 하린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의 코에도 새빨간 무언가가 한 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너도 흘리는데?”
“어? 이게 왜 지금 흐르지.”
하린이는 자신 또한 휴지를 뜯어 대충 코를 틀어막았다.
“코피도 시간에 맞춰 흘릴 수 있는 거야?”
“그 말이 아니라, 이러면 쌍방이 되는 거잖아.”
따스했던 봄이 지나 양손과 귓등이 시린 계절이 찾아왔다. 겨울 방학을 맞이하기 위한 최종 단계인 기말고사 만을 남겨두고 모두 마지막 힘을 다해 학교를 나오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