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수야 Dec 29. 2024

하얀 꽃잎처럼

“하얀아, 오늘같이 시험공부할래?”

“어디서?”


그 집이 본인 집일 거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역시나였다. 당당하게 ‘너’라고 말하는 덕에 장소는 확정되었다. 하얀은 별다른 저항 없이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하린은 손하를 향해 밝게 인사를 하는 중이었고, 이내 손하는 과일을 내오겠다며 주방으로 떠난 후였다. 하얀은 자신의 방으로 하린이를 데려갔다. 접이식 책상을 펴 책상 위에 공부할 교과서를 하나둘 올리자 하린도 맞은편에 앉아 책가방을 열었다. 엄마 손하는 콧소리와 함께 조심스레 문을 두들겼다. 깔끔한 접시 위 단정하게 깎인 과일들은 식욕을 불러일으켰고, 맛있게 먹으라는 말과 함께 하얀이의 머리를 정성스레 쓰다듬었다.


“감사합니다.” 하린은 손하를 보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시험 범위를 체크하고 중요한 단어에 형광표시를 하고 있는 긴 시간 동안 하린이의 시선은 노트가 아닌 하얀이였다. 공부가 목적이 아니었음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그만 보지 그래?”

“너 내가 보여?”


장난기 섞인 말투로 하얀이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필기에만 집중하는 하얀에게 삐쭉거리는 입술로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왜 날 안 좋아해?”

“응?” 그의 시선은 여전히 책상 위에 맴돌았다.


“왜 나만 너를 좋아하냐고.”

“억울해?”


이 상황에 태연하다 못해 천연덕스럽게 물어보는 하얀이의 볼을 꼬집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그 얼굴이 너무 연꽃처럼 순수하고 맑았다.


“억울해서, 나중에 죽으면 영혼….”

“좋아.”


순식간에 하린이의 눈동자가 파도 위 윤슬처럼 빛났다.



“안 좋다고 한 적 없다고.”



하얀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신의 필통을 열어 투박하고 네모난 지우개를 꺼냈다. 그리고 매직팬으로 하얀 하트 하린이라 적어 당당하게 건넸다. 지우개에 적힌 글자를 본 하얀이는 역시나 부드럽고 잔잔하게 웃어보았다.


“이거 나 주면, 네 지우개는?”

“네 거 가지면 돼.”

“어?”



시간이 꽤 흘러 어둑해질 무렵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린이를 바래다주는 둘의 손은 마치 하나처럼 맞닿아있었다. 쌀쌀한 12월의 바람은 머리칼을 세차게 스치고 지나갔다. 잡고 있던 손을 끌어 자신의 재킷 주머니에 넣곤 어딘지 모를 길가 한구석 자리에 하린을 세웠다. 영문을 모르는 채 목도리에 얼굴을 반쯤 감추고 있던 하린은 고개를 빼꼼하고 올렸다.


"나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어?”

“뭔데?”


분위기가 차분하다 못해 진지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고들 말하지만 이 대화는 14세 둘의 앳된 사랑의 시작과 끝을 알렸다.




“나 딱 1년만 좋아해 주라.”


***


2026년 9월 22일 출생

2041년 9월 22일 사망

백하얀



묘지가 좋겠다 생각했다. 자주 와서 벌초도 해주고, 하얀 꽃도 올려주고, 소주도 뿌려주고 그렇게 어른이 된 하얀이와의 술 한 잔을 기울이고 싶었다. 15년 전 여자가 내게 적은 말이 문득 생각이 난다. 끝이 있는 15년간—끝이 없는 사랑을 아이에게 주길 바란다는 말. 조금만 더 일찍 수첩을 열어볼 걸 그랬나 보다. 13세 생일이 아닌, 조리원에서 나온 그날 모든 내용을 읽어봤더라면. 그리고 빨리 인정했더라면. 2년보다는 조금 더 긴 시간을 또 다른 감정으로 사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폴라로이드로 생일 기념 가족사진을 인화했다. 그 사진을 품에 안고 자던 하얀이를 아침에 보았을 때 검정 수성펜으로 꾹꾹 눌러 담은 글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거 알아요? 딸기 꽃잎의 본래 색은 하얀색이래요.





딸기는 내가 지어준 태명이고, 하얀은 남편 도인이 지어준 이름이다. 매번 태명을 가지고 앞다퉈 장난치듯 싸우는 우리를 사랑스럽게 바라만 보던 하얀이가 떠올랐다. 남기고 간 문장은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둘 다 똑같은 나니깐. 이젠 싸우지 말고 잘 지내라고.



하얀이는 죽는 순간까지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겉 보기에 다를 것 없는 평범한 15세 아이였다. 15살 마지막 생일 하얀이는 여전히 웃고 있었고—우리는 그 미소의 의미를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평소와 같이—보통의 아이처럼—살고 싶었던 그 미소로 난… 목 끝까지 차오르는 비통한 울음을 끝내 삼켜 넘겨야만 했다. 따듯한 체온을 가진 채 살아있는 아이를 붙잡고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며 마냥 울 수가 없었다. 우리 부부에겐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자식에게 그동안 흘릴 수 없었던 뜨거운 눈물로, 아들에게 온기를 채우는 시간만이 주어졌다. 지금은 묘지에 와있다. 15살이 된 맥스는 하얀이의 묘지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맥스를 불렀다.


“맥스야 이리 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몸을 일으켜 옆자리 묘지로 건너와 도인의 손길을 느끼는 중이다. 들고 온 꽃다발을 조용히 묘비 옆에 올려두고 우리 셋은 고개를 숙였다. 두 번의 절이 끝난 후 나는 정장을 차려입고 덤덤한 표정으로 묘비를 바라보는 회사 동기 박준호를 토닥였다.




2026년 9월 29일 출생

2041년 9월 29일 사망

박하린




세상에는 유전자 결함으로 인한 수많은 정체불명의 병들이 발생한다. 편지 한 통만을 남기고 떠나 어느 날 불쑥 찾아와 박준호에게 자식을 버리고 간 그 여자 또한 마찬가지였을 거다. 편지에는 하린이의 생년월일, 그리고 ‘15살까지만 키워줘, 어차피 그 후엔 죽어.’라는 딱 두 가지 내용만이 적혀있었다고 했다. 15년 전, 나를 찾아왔던 의문의 여성을 한 사원의 핸드폰 속 사진첩에서 다시 얼굴을 마주하게 될지도 예상하지 못했다. 외국에 사는 제일 친한 이모라는 말만이 그동안의 모든 상황을 설명했다.



원인 모르는 병을 해결할 방법은 애석하게도 없다. 이들의 죽음 역시 돌연변이의 이름으로 끝이 났다. 운이 나쁜 나는 돌연변이 생명체로 태어나, 결국 아들을 죽인 엄마가 되었다.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우리는 모두 죽을 날을 염두하며 살지 않는다, 물론 특이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내가 키우던 동물보다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일이 일상화된다면, 결국 우리는 모두 멸망하게 될까? 내게 남은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오늘 하루를 온전히 나를 위해 살길 바란다. 그게 하얀이가 바라왔던 삶이자, 엄마로서 내가 줄 수 있었던 5,478일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