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수야 Dec 12. 2024

의문의 경고

평범한 다른 임산부들과 다를 바 없는 10달을 보냈다. 오히려 살이 조금은 붙은 모습으로 건강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나 기다리던 아이였는데, 잠시 모성을 잃어버린 그날이 창피하고, 미안했다. 아이를 갖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과는 달리 임신에 성공했고, 도인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캐리어를 열었다 닫았다 하며 출산 가방을 준비했다.


“자기야 그만 열어, 캐리어 고장 나겠어.”

“뭐 빠진 건 없겠지?” 본인이 출산이라도 하는 듯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있으면 또 챙겨 오면 되지.”


손하는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양팔을 벌려 도인에게 이리 오라 손짓했다. 도인의 걱정 어린 얼굴 근육들이 서서히 웃음으로 번지며 침대에 쓱 하고 엎드려 손하의 배에 귀를 가져다 댔다.


“딸기야, 기억해야 해.”

“뭘?”

“너의 태명은 엄마의 의견 100프로 란다?”


도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하는 가볍게 도인의 정수리를 통하고 쳤다.


“아빠는 좀 더 멋진 걸로 지어주고 싶었어.”


손하가 자신을 더욱 센 힘으로 과격할 것을 예상한 도인은 헤벌쭉 웃으며 부리나케 침대를 벗어났다. 아들의 태명이 딸기인 게 조금 안 어울리나 싶다가도 뭐 어떠냐는 마인드로 딸기의 마지막 초음파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혹시라도 바람에 쓸려 흠집이라도 날까 싶어 조심스레 딸기의 얼굴 부분을 매만졌다.


출산 당일, 도인과 함께 온 가족이 대기실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도인은 한 여름이라도 맞이한 듯 얼굴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로 아이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자신의 아이 목소리와 세상을 향해 처음 내어보는 아이의 목소리가 만나는 순간이 찾아왔다. 손하는 제왕절개로 아직 처치실에 있었고, 딸기는 쭈굴쭈굴한 얼굴과 태지로 뒤섞여 신생아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마저 사랑스러운 듯 흐뭇하게 바라보며 도인은 자신을 닮은 것 같다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딸기가 태어나고 2주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제왕절개로 자연분만을 한 다른 산모와는 달리 일주일 동안 병원 신세를 지어야 했지만, 산후조리원에서의 일주일간 하루 종일 울어대는 딸기의 기분을 알리 없는 초보 엄마, 아빠의 육아기로 혼이 나가있었다. 조리원 퇴소를 앞두고 딸기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하얀이 어때?”

“백하얀?”

“하얗게 맑고 긍정적으로 살라고.”


도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자신의 옆에서 고이 잠들어있는 딸기를 보니 새하얀 얼굴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던 도인은 조용히 '하얀아~'라고 불렀다. 아빠의 목소리를 들은 건지—이름이 마음에 들었는지 입꼬리를 꿈틀거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백하얀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태어났다.


조리원 마지막 날 퇴소를 준비하며 짐을 쌌다. 시간을 내고 방문해 준 시어머니가 도인과 함께 짐을 챙겨 먼저 주차장으로 하얀이를 데려갔다. 산후조리원의 자동문이 열리고 새로운 삶을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걱정과 설렘이 한가득 섞인 콧바람으로 들이마셨다. 



“저기요.”



소리에 고개를 양옆으로 돌리자 복도에는 손하말고 아무도 없었다. 60대 중년의 여성은 천천히 손하에게 다가왔다. 모르는 여자가 자신을 향해 오니 저절로 몸이 경계하듯 뒤로 발걸음질 처졌다. 여자의 눈은 어딘가 모르게 촉촉했다. 자신에게 해를 끼칠 의도라기엔 단정하게 하나로 묶은 머리로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네?”


완벽하게 긴장을 풀진 않았지만, 여자가 찾아온 이유를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여자가 하는 말은 모두 꿈이라고 하고 싶었다. 꿈이어야만 했다. 아니다—증상이 나타난 생일부터 나는 혼수상태에 빠져있는 거라고 하는 게 더 나았다. 그래야만 했다. 한 마디로 정리해 간결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엔 손하가 앞으로 겪을 고통을 단순하게 표현하는 듯했다. 여자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28년 전 뮤테이션 엔드 증후군에 걸린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이보다 더 정확한 자기소개는 없었다. 여성은 이어 말했다.



“그 병에 걸린 여성이 낳은 아이는 15세가 되면 죽어요.”



중년의 여성이 하는 말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뜸 와서 하는 말이 증후군에 걸렸다는 말과 함께 아이가 죽는다니, 자신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물어도 여성은 머리만 푹 내린 채 고개를 저었다. 때 마침 엘리베이터가 띵-하는 소리와 함께 양쪽으로 시원하게 열렸다. 서둘러 장소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공간 안으로 들어가 지하를 누르고 닫기 버튼을 수차례 눌러댔다. 그러자 여성은 다급히 닫히는 문틈 사이로 손을 끼운 채 손하에게 손바닥보다 조금 큰 노트 한 권을 건넸다. 노트는 여성의 힘에 의해 억지로 손하의 출산 가방에 끼어 들어갔다. 노트를 꺼내 다시 전달하려는 사이 여성은 어느새 눈앞에 사라진 후였다. 엘리베이터는 어느 순간 지하에 도착했고, 손하를 멀리서 부르는 도인의 손짓이 보였다.


집에 도착해 아이를 재우고 남편 도인은 어머니를 데려다준다며 다시금 밖으로 나갔다. 자꾸만 자신의 가방에 있는 수첩이 눈에 거슬렸다. 단 두 문장으로 사람을 혼동에 빠트릴 수 있는지 여성의 능력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수첩을 버리기 위해 식탁 의자 위에 올려 둔 가방을 향해 걸어갔다. 수첩을 꺼내는 순간 바닥에 무언가 툭하고 떨어졌다. 손하는 떨어진 무언가를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사진 속에는 웃고 있는 한 아이가 보였다. 아이의 얼굴 옆에는 새하얀 도자기로 빗은 듯한 유골함이 놓여있었다.


生 1997年11月15日

홍정우

卒 2012年11月15日


봉안당 안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행복해 보이는 사진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까 그 여성으로 추정되는 아이 엄마와 남편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정우라는 아이. 교복을 입은 채 신이 난 듯 손으로 브이를 그려 보이는 사진도 한 장 놓여있었다. 사진을 식탁 위에 내려두곤 수첩을 열었다. [정우 일기]라는 글이 수첩의 앞면에 크게 적혀있었다. 페이지를 넘기자 매일은 아니지만 돌잔치, 첫걸음마, 생일, 입학 등 기념일이 있을 때마다 정우에 대해 적은 듯 보이는 엄마의 기록이었다. 평범해 보이는 내용들이었다. 빠르게 페이지를 뒤로 넘기자 10세 때의 기록이 눈에 들어왔다.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10살 생일이 지난 후 정우가 코피를 흘렸다. 문득 과거의 일이 불현듯 스쳐갔다. 다행인 건 그 후로 코피를 흘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제발. 아무 일도 아니길 바란다.

.

.


13살 정우의 코피가 작은 양이지만 매일 흐르기 시작했다. 뮤테이션 엔드 증후군이라고 한다. 병명의 이름은 시간이 꽤나 흐른 후 미상의 병에서 이름을 얻어 세상으로 나왔다. 나와 같은 증상을 보이던 두 명의 여성이 병원을 찾아왔다고 했고, 나를 포함해 총 3명의 여성이 이 병에 걸렸다.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그들은 아이가 있는지, 우리 정우만 그런 것인지.

.

.


14살 중학교에 입학했다. 교복이 얼마나 잘 어울리던지. 사진을 여러 장 많이 찍었다. 3년만 있으면 남편이랑 같이 졸업사진도 찍을 생각을 하니 벌써 설렌다.



손하는 14살이라는 숫자를 발견한 순간 들고 있던 수첩이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등줄기에는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고, 도저히 다음 장을 넘길 용기가 나지 않아 그 상태로 멈춰있었다. 새근새근 잠이든 아이가 눈이 들어왔다. 단순히 임신은 손하의 증상을 없애 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목적성 임신을 한 건 단연코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이는 이미 그녀의 몸에서 그녀의 유전자를 받아, 10달을 살아 숨 쉬었다. 그냥 임신 같은 걸 하지 않았더라면—뉴스에 나온 여자처럼 죽어버렸다면—본인 같은 끔찍한 돌연변이 유전자를 받은 생명체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천사 같은 자태를 뽐내고 있는 저 아이의 인생의 끝을 정해버린 괴물 같은 엄마라는 사실이 온몸을 감싸고돌아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자책감에 쌓여 모유수유를 하는 동안에도 마음이 내내 불편했다. 아이를 안고 토닥이며 잠을 재우는 순간에도, 여느 부모와는 또 다른 의미의 영혼 없는 눈동자가 공허하게 새벽을 떠돌고 있었다. 며칠의 시간이 흘렀을까, 손하는 질병에 대한 부정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 수많은 생각과 불안감이 만든 결론일지 모른다. 하얀이는 그들과 다르다고 믿으며, 서랍장 깊숙한 곳으로 수첩을 꾸겨 넣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손하의 표정은 한결 밝아졌다. 



어느 날 현관문에서 비밀번호가 쳐지는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어쩐지 평소와는 달리 바로 모습을 보이지 않는 남편이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현관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도인의 뒷모습과 큰 종이상자가 잔뜩 놓여 있었다.


“이게 다 뭐야?”


도인이 등을 돌려 앞모습을 보이자 태어난 지 3개월쯤 되어 보이는 작고 꼬물거리는 골든레트리버가 품에 얌전히 안겨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새끼 강아지의 등장에 당황스러워하기도 잠시, 바닥에 강아지를 내려놓자 아직 다리의 힘이 부족한지 대자로 뻗은 모습이 귀엽고 하찮아 웃음이 나왔다. 강아지는 하얀이의 탄생 기념 시아버지의 선물이라고 했다. 워낙에 동물을 좋아하는 집안에서 자란 둘에게 “맥스”는 자연스레 가족이 되었다.


의문의 여성이 준 수첩은 그날 이후로 서재 서랍에 감춰져 한 번도 들춰보지 않았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