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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커라 Jul 12. 2022

꽃은 반드시 시들고

식탁은 꽃을 기다리고

3월 5일 사전투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빨간 다라이(비표준어지만 이 말이 꼭 어울리는 바구니)에 프리지아를 담아 놓고

"한 묶음에 삼천 원"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야말로 홀린 듯 다가갔다.

"두 묶음 사면 더 보기 좋을텐데."

떨이를 팔고 싶은 아주머니 말에 잠깐 흔들렸지만 한 묶음이 나에겐 적당하다 싶어서

삼천 원을 건넸다. 집으로 돌아와 창고 구석에 뒹굴던 꽃병을 꺼내 꽂으니...

집안이 화사하다.


옛 동화에서 임금이 색시가 될 후보 여성들에게 "동전 하나로 방안을 가득 채울 수 있는게 무엇이냐"고 하자

현명한 처자 하나가 촛불을 사와 빛으로 방을 가득 채워 결국 왕비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저 프리지아가 나에게는 그 촛불의 빛이로구나.

샛노란 색이 은근하게 강렬하다. 향은 맹렬한 듯 은은하다.

몇 송이 되지 않는 저 꽃들이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하염없이 꽃병에만 시선을 둘 뿐.


그렇게 열흘 정도 지났을까. 꽃잎이 쪼글쪼글해지더니 봉오리에 맺혔던 작은 꽃망울까지 모조리

시들어버렸다. 이제 정말 끝일까. 행여나 썩을까 2~3일에 한번씩 줄기를 가위로 살짝 살짝 잘라주었건만

열흘 남짓한 시간만에 나의 꽃사치(?)는 끝이 났다.


젊은 날에는 꽃 선물만큼 무익한 것도 없다 싶었다.

받는 순간에나 예쁘지, 비싸지, 시들면 처리 곤란. 그야말로 "예쁜 쓰레기"라 여겼는데


이젠 꽃의 무익함에 푼돈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식탁 위에 꽃 한송이가 있으면 마음이 뭉근해진다.


가족들과 밥을 먹으며

동시에 입으로 서로에게 비수를 꽂아대는 저 식탁 위에

다시 꽃병을 올려둔다.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잘 안다는 이유로

면도날같은 단어와 문장으로 퍼붓는 가운데

꽃 몇송이 담긴 유리병은 늘 비현실적으로 예쁘다.

서로를 향해 칼날을 휘두르다가

얼핏 보이는 저 꽃들이

내 현실을 비현실로 돌연 바꾸어준다.


<*팡에서 구입한 꽃다발>





설탕의 집



자르기 쉬운 것들은 예쁘다.


둥근 칼이 파고든다.


너는 참 질기구나


빵 사이로 쏟아지는 백지
끓고 있는 설탕
엄마는 맨손으로 냄비를 저었다
우리들은 일렬로 앉아 
하얀 벽을 보았다


아빠는 동화가 질색이라고 했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엄마는 설탕을 접시에 덜어냈다
쩍쩍 붙은 손가락이 오그라들었다


우리는 매일 식탁에 앉아 
같은 시간에 빵을 먹는다
서로를 찢어 입에 넣는다
뜨거운 잼을 온몸에 발라
구석구석 핥는다


식탁은 매일 한 뼘씩 자라나고
빵 접시도 늘어났다
구멍 난 호주머니에는
부스러기로 가득 찼다


부스러기를 몰래 주우며
어떻게 하면 식탁을 반으로 자를까
둥근 칼과 상의했다


엄마는 동화는 슬퍼야 잘 팔린다고 했다
먹고 산다는 게 슬프다고 하자
모두 방으로 들어갔다


방마다 부스러기를 흘리고 다니지만
아무도 주워 먹지 않았다


그날 밤 
무딘 칼로 식탁을 잘라낸다
동화 속에는 밥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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