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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커라 Dec 21. 2022

남의 말 엿듣기

듣고 싶어서 들은 게 아니야, 들리는 걸 오또케

카페 한 구석에서 혼자 우유 넣은 홍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10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나무탁자 맨 끝에 앉아 있는데 두 세 칸 건너편에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녀가 앉는다. 


자기야, 하는 말로 보아 연인사이인 듯 했다. 

주로 여자친구가 말을 많이 하는 편이었는데 오빠로 보이는 남자에게 어떤 삶을 추구하고 싶냐고 묻는다. 

목소리가 지나치게 커서 주변을 좀 의식하는 티는 많이 났지만 

대화 전체적으로는 상당히 건설적이고 연인이 나누기에 매우 좋은 대화였다. 

(다만, 목소리가 너무 커서 정말 주변에 우리 얘기 좀 들어 봐라는 의도를 의심케 했다. 

사실 시끄럽기도 했다.)     

둘 사이의 대화는 점점 무르익어 결혼을 하게 된다면 어떤 부모가 되느냐로 주제가 옮겨갔다.

(마지막으로 다시 말하지만 엿들은 게 아니라 안들을 수 없는 성량의 목소리였다.)


남자는 차분하게 자기는 아이들하고 잘 놀아주는 아빠가 되고 싶다고 했다. 

운동도 같이 하면 좋겠다고 했다. 

여자는 자기가 좋은 엄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많이 하는 엄마가 되고 싶다고 한다.


 아직 오지 않은, 올지도 모를 미래를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저 나이의 청년들만이 할 수 있는 특권과도 같은 일이라 생각하니 부럽기도 했다. 

내가 미래에 대해 긍정적인 상상을 해본 적이 언제였던가.      


연인들은 음료를 다 마시자 미련 없이 일어나버렸다. 

이번엔 에어컨 앞에 있던 젊은이 2명이 그 자리가 비자마자 옮겨 앉는다. 

연인은 아닌 두 남녀는 어떤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함께 한 듯했다. 

상냥한 존대를 쓰는 두 사람은 공부가 쉽지 않죠? 라며 서로의 어려움도 토로하고 

대화가 잠잠해지면 곧 공부에 몰두하고 다시 또 간간이 이야기를 이어나가곤 한다. 


남자는 머리가 어깨를 덮을 듯 말 듯한 장발이었는데 윤기 나는 머리카락만큼이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이번에는 고백하건데 엿들은 게 맞다. 두 사람 다 목소리가 너무 부드럽고 나긋나긋 서로를 배려하는 말투라 귀가 저절로 그 자리로 날아가 붙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어떤 시험을 준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취업 또는 자격증 취득일 것 같았다. 

하루의 일상도 살짝 공유하는데 시험 준비를 위한 24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들어보니 

아침부터 밤까지 누구의 간섭 없이 스스로를 통제하고 채찍질하는 삶이 쉬워 보이진 않았다. 

나의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엄마가 깨워주고 밥 차려주고 하는 삶에서 막 벗어나던 20대 중후반, 

정말이지 삶을 통제하지 못해 불규칙하기 이를 데 없이 지내었는데.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 일정하게 밥을 먹고 할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스스로를 다독여야 하는 일인지 그때는 미처 몰랐었던 것 같다.


두 사람은 공부가 지루했는지 대화를 아주 한참 나누었다. 


나는 저 시간이 결코 무심하게 낭비되는 시간이 아니리라 확신한다. 

두 사람은 길고도 지루한 터널을 건너는 중이다. 

아주 두렵고 지난한 시간일 텐데. 

서로 잠시나마 GPS가 되어 

길지만 계속 걷다보면 바깥이 나온다고 다독이고 있는 것이다. 


설령 오늘 저녁을 낭비한다 해도 저 시간은 내일 다시 집중하고 힘을 내는 동력이 되겠지.     

아, 그나저나. 나도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여기 앉아 있는데. 왜 이렇게 남사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거냐.



- 2022. 5월 6일, 지금 다니는 회사 면접을 앞두고 스타벅스에서 공부하며 썼던 글.

  오해마시라. 진짜 열공했음. 잠깐 뻘짓하며, 나도 나의 길을 찾아 헤매였었더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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