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잘랐다. 바뀐 머리가 어색하다.
오후에 밥을 먹다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머리가 지저분해 보였다. 머리를 다듬고 싶어졌다. 망설일 것 없이 스마트폰을 들었다. 예약 없이 바로 자를 수 있는 미용실을 검색했다. 섣부른 판단이었다. 조금 더 미용실을 신중히 골랐어야 했다. 하루 이틀 기다리더라도 예약을 해서 다니던 미용실로 갔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더벅꺼벙머리가 되었다. 웃기게도.
내가 찾아간 미용실의 미용사분은 나이가 지긋해 보이셨다. 아까 전화한 사람이라고 하자 어-어- 여기 앉아요. 나를 자리로 인도하셨다. “어떻게 잘라줄까?” 물으셔서 “기를 거니까 길이 자르지 말고 층만 내주세요.”라고 대답했다. 그분은 알겠다며 분무기로 물을 칙칙 뿌리시곤 머리에 가위를 가져다 대셨다. 여기까진 순탄했다. 평소에 다니던 미용실에서 풍기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분은 조선 사랑꾼이라는 프로에 눈을 떼지 못하셨다. 내가 보기엔 속 답답한 내용인데 그분에겐 흥미진진한 내용이었다 보다. 나는 불안해졌다. 머리가 숭덩숭덩 잘리고 머리 덩어리들이 바닥으로 낙하하고 있었다. 그 순간 한마디를 했어야 했을까.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분을 믿기로 했다. 은둔 고수처럼 눈으로 보지 않아도 정확하게 머리를 잘라낼 수 있는 스킬을 가진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분은 뜬금없는 행동을 하나 더 했는데, 머리를 자르다 말고 커피포트에 물을 끓였고, 물이 끓자 믹스커피 알갱이가 든 종이컵에 물을 부으셨다. 그때 난 거울을 보았고, 절체절명의 위기를 느꼈다. 내 머리의 생명이 다한 기분..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머리를 자르면서도 티브이를 보시던, 커피포트에 물이 끓었다며 머리를 자르다 말고 컵에 물을 부어 커피를 타시던, 새까만 왕뽕 머리를 한 미용사님이 잘라주신 내 머리. 소심한 나는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계산을 하며 미용실을 나섰다.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그분이 나보고 “예쁘게 하고 다녀”라고 말씀하셨다. 그냥 웃었다. 미용실을 나와선 빠르게 달려 친구가 있다는 미용실로 갔다. 마침 친구도 근처에서 머리를 자르고 있다고 했다. 친구가 있는 미용실의 문을 열었다. 내가 몸을 밀어 넣듯 들어가자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이 내 머리를 보고 경악했다. 사실 나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감으면 또 달라 보이겠지’ 안위했는데, 모두가 그렇게 반응하니 이게 단단히 잘못된 거구나 다시금 깨달았다.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그렇게 이상한가 고개를 요리조리 돌려가며 끊임없이 거울을 바라봤다. 내 머리가 얼마나 안타까운지 예약이 많아 머리를 만져줄 수 없다던 미용사님이 나를 보고 다듬고 가라고 했다. 미용사님이 먼저 온 손님의 머리를 자르는 동안 친구와 만담을 펼쳤다. “90년대 울프컷 아니야?”, “이준기 석류 머리 같은데”, “싸이월드 시절로 회귀한 거 같아” 여러 얘기를 하던 중 미용사님이 나를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머리 망쳤다고 울지 않고 밝아 보여서 좋네", ‘내가 머리 망쳤다고 울 나이는 지난 거 같은데..’ 속으로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대답하며 웃었다. 앞선 손님이 떠나자 미용사님은 내가 갔던 미용실 원장님한테 실망했다며 내 머리를 다듬어주셨다. 삐뚤빼뚤한 앞머리를 일자로 만들어주셨다. 샤기컷 같은 뒷머리를 정돈해 주셨다. 어느 정도 단정한 커트머리가 되었다. 크게 한숨을 한번 쉬고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괜찮은 거 같아요. 머리는 또 자라니까 괜찮아요."
몇 시간 전까지 나는 분명 단발머리였다. 꽁지머리였지만 머리를 묶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조금 더 길어서 반묶음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기장을 치지 않고 다듬기만 하려고 했다. 나는 다시 커트머리가 되었다. 그렇다고 완전 커트도 아니고 어정쩡하게, 앞머리는 눈썹 위로 올라가고 뒷머리는 휘날리는 2002년 뒷머리를 휘날리던 이병지 골키퍼님 같은 스타일을 가졌다. 꺼벙이가 생각났다. 머리가 빨리 길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지금도 어색한 느낌에 연신 뒷머리만 만지작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