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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븐니 Sep 12. 2021

민설아의 부활은 없었고,배로나의 결실은 있었다.

너는 시청에도 다 계획이 있구나 l <펜트하우스 3>에 중간은 없었다

민설아의 부활은 없었고, 배로나의 결실은 있었다.


<펜트하우스 3>에 중간은 없었다 l 많은 사람들의 부활 설정에서, 민설아의 부활은 없었다.


펜트하우스 시즌 3가 9월 10일 최종회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펜트하우스 1>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자면,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민 설아’라는 아이의 한 죽음에서 시작된 이야기다. 많은 이들은, ‘민설아’와 그를 괴롭히는 아이들과의 성장 드라마라고도 여기면서 드라마의 이야기를 지켜보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부모 된 입장에서의 성인 배우들과 어린 청춘 배우들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킨 복잡 미묘한 드라마였다. <펜트하우스 2>에서는 시즌 1보다는 더 풍성해진 연출력으로 그야말로 시청자들이 다음 화를 예상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는데, 이러한 일련의 모습에서 이 드라마가 얼마나 인기 있고 많은 관심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화제작 펜트하우스 시즌 3의 결말은, 한 마디로 청춘 배우들 제외, 성인 배우들 전원 사망이다. 이미 펜트하우스 3 중간에서 그 역할을 다하고 죽었던 오윤희, 이후 주단태, 하윤철, 천서진, 심수련, 로건리 모두 사망. 더불어 펜하3에서 중간이 없는 대목은 ‘민설아’ 이야기로 시작했던 드라마에서 ‘민설아’는 없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극 중 초반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이후에 ‘부활’(?)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의 이야기는 ‘민설아’의 죽음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한 그의 가족들의 노력, 또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손을 쓰는 다양한 인간들의 이해관계와 욕망 관계가 그려지는 드라마였다. 시청자들의 바람에서 ‘민설아가 나중에 살아서 있는 것이 드라마의 반전일 것이다.’라고 하는 모든 추측도 다 맞지 않았다. 드라마는 민설아가 이루지 못한 꿈을 ‘배로나’에게 이루어 주며 끝을 맺었다.


배로나와 오윤희, 하은별과 천서진, 주석경과 심수련 l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최종회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배로나’가 엄마를 기억하며 자신의 곡을 멋들어지게 부르는 연주회 장면이다. 주단태로부터 괄시당하고, 천서진으로부터 방해를 받고, 진짜아빠였던 하윤철에게는 배신(?)을 당했던 그렇게 피지 못할 것 같았던 그녀의 목소리가 모든 나쁜 어른들의 존재가 소멸된 이후에 이루어졌다. ‘배로나’가 오윤희와 함께 예술고에 입학하기 위하여 손 떨리게 기도하고, 도전하며, 엄마와 함께 꿈을 향해 달렸던 모습이 드라마에서 그려지는데 이 모습이 없었더라면 <펜하3>의 마지막 회는 의미가 없었을 것 같다. 그 정도로 드라마의 모든 ‘악’에 대한 응징을 ‘선’을 그리며 달려온 –물론 오윤희는 자기 자식을 위해 술김에 민설아를 밀기도 하였다- 오윤희와 배로나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내용이 중간은 없었지만, 인과응보의 교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한편, 배로나, 오윤희 모녀의 모정만큼이나 하은별, 천서진 모녀, 주석경, 심수련 모녀의 서로에 대한 사랑 역시 드라마를 보는데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킨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천서진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는 광기 어린 행동을 선사하면서도 하은별에게만큼은 진심이었고, 그녀가 잘되기를 바랐다. 심수련 역시, 민설아 외에 주석경이 자신의 친자식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석경이에 대한 원래의 마음보다도 더 깊어진 사랑을 보여주는 행동들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보면 펜트하우스3의 드라마는 강렬한 ‘모성’이 그들을 그렇게 갈등과 싸움으로 밀어 넣었던 것은 아니었을지에 대한 생각도 들게 된다. 모두 한마음 한 뜻으로 '내자식 건들면, 넌 죽는다'였으니 우리네의 엄마들의 마음이 저들의 모습 아니었을까?


펜트하우스가 우리에게 남긴 것, ‘선함’과 ‘악함’의 경계 속 '도토리키재기'


펜트하우스가 여타 드라마와 특기할만한 차이점을 드러낸 점은, 아마 브레이크 없는 그들의 악한 본능의 묘사, 인간의 본연의 그늘 같은 모습의 묘사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나름 악해졌던 사유와, 자기 자신들에 대한 삶의 강력한 의지(그들이 이를 악물고 지키고, 악해질 수밖에 없었던 환경적 상황)는 이해가 가는 바이나 그들에게는 좀처럼 악을 선으로 바꿀 수 있는 전환능력이 없었다. 악을 더욱 악하게 만들어내는 엑셀 기능만 존재하고 자신들의 욕망과 나쁜 행동에 대한 브레이크는 만들지도 밟지도 못했다. 드라마는 현대사회의 모습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문학작품이라고 하는데, 우리의 모습이 이런 상태는 아닐까? 에 대한 반성도 들었다. 한번, 용서하고 넘어가면 될 일도 끝까지 미워하고 반목하고 잘잘못을 따져가는 우리들의 브레이크 없는 모습들.


그렇게 주단태와 천서진을 보면, 펜트하우스라는 화려하고 고가의 빌딩에 산 채로 자신들의 삶의 모습을 지키려고 하는 드라마의 초, 중반에 모습에서 성공한 모습이란 그들의 모습일 수도 있는 환상을 들게 만든다. 하지만 그들의 인생을 들여다보자니, 주단태는 ‘백준기’라는 이름의 인생이 있었던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을 지닌 채로 악만 남은 불쌍한 인물이었고 천서진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눈앞에서 죽어가는 아버지를 보고도 모른 채 하는 인정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나마 선한 성품의 역할로 나오는 오윤희와 심수련, 하윤철과 그의 친구들도 자신들의 욕망과 목적 앞에서는 이내 배신과 꼼수로 서로를 속고 속이는 ‘선함’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인물들로 나왔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선함과 악함의 경계는 허물어진 지 이미 오래라는 생각이 든다. 자기 자신들의 슬픔과 상처에 대한 ‘정당성’을 얻으려는 인간들의 게임으로 변질된 지 오래된 펜트하우스라는 생각이 들기에, 그 외면적인 모습은 화려할지언정 안에서 활동하던, 사회가 선망했던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큰 배울 점을 찾지 못했다. 과거의 드라마는 선과 악의 구도를 비교적 색깔이 선명하게 나누어 나쁜 사람을 벌 받고, 착한 사람은 잘 살아간다라는 교훈을 주었다면 펜트하우스에서는 모두가 그만그만한 선함과 악함으로 서로가 서로의 인생을 ‘도토리 키재기’하고 있었다는 느낌을 준다. 어느 누가 가장 악했는가? 어느 누가 가장 선했는가? 드라마를 보면 모두가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펜트하우스 애청자라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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