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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븐니 Sep 19. 2021

나의 교회 History: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장소

●매거진 <가브리엘을 닮아 소식을 전해요> 5회: 가정 기도의 사연

교회 관련 기사를 자주 챙겨보는 내게 들려온 소식


언론으로부터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원로 목사님, 조용기 목사님 관련 기사가 제공되었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만날 수 없다는 슬픈 소식이었다. 나는 그의 형제 조용목 목사님께서 운영하시는 교회에서 30년 넘게 신앙을 지키고 있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연결에 연결이 된 소식들을 전해 들으며 신앙생활을 해 온 내게 그 슬픔은 크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줄 곧 내가 교회를 옮기지 않고 한 곳만 오랫동안 다닌다고 말을 하면 '어떻게 그렇게 한 곳만 오래 다닐 수가 있어요? 이사는 안 갔어요?' 이런 궁금증을 품는다. 경기도 내에서 이사를 했기에 전국적으로 성전이 분포해있는 우리 교회의 분포로 인하여 교회를 옮길 필요가 적게 되었다. 그래서 언젠가 교회를 다니다가, 나는 우리 교회를 믿는 건가? 신을 믿는 건가? 에 대한 질문이 들기도 하였다. 그 고민에 대한 답은 나는 우리 교회가 없어져도 성경대로의 말씀을 전하는 다른 장소의 교회를 찾아다녀야 하겠다고 결론을 내린 적이 있다. 그렇다. 나는 신을 믿는다.


신을 믿지만, 우리의 신앙과 믿음을 굳건히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장소가 있다. 각 성도들이 소속되어 있고 섬기는 한국의 교회들이다. 나는 교회를 다니면서 어린 시절에는 '찬양율동반 봉사'를 하였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까지 매일 참석했다고는 자랑스럽게 말 못 하겠지만 비교적 열심히 참석하며 말씀을 들었다. 이후 성인이 되고 나서는 '방송통신 선교회'에 뜬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을 하여 짧은 시간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나의 봉사활동이 교회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몇십 년의 기간 동안 오랜 세월 그 봉사 활동을 섬긴 분들이 많기에 논하는 것 자체가 부끄럽다. 다만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서 멋진 분들과 함께 사역을 했다는 것 자체가 나 스스로는 만족하고 행복했다. 부모님은 그 봉사를 마친 뒤, 나에게 수고의 의미로 새로운 침구를 선물해주셨으니 그 정도의 축하면 만족했다. 이렇듯 우리 교회와 인연이 닿은 게 신기하고 감사하다. 다른 많은 교회와 인연이 닿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내가 교회에서 말하는 복음의 내용과 구원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배경에는 엄마의 신앙심을 들 수 있다. 엄마는 어린 시절부터, 일요일에 교회 나가는 것을 어떤 교육보다도 중요하게 여겼다. 빛의 전사 같은 모습으로, 일요일에 쉬고 싶어 하는 나를 그렇게 교회에 손을 잡고 나갔다. 그런 엄마는 나에게 한영 성경책과 더불어, 지금의 한국에서 멋진 목사님을 두 명이나 자녀로 둔 조두천 장로님의 <행복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는 책을 선물해주며 신앙에 대하여 흔들리는 날들에 '행복을 만들어 내라'라고 말씀하시며 선물을 주시곤 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엄마는 정말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나에게 최대한으로 인자하게 대해 주신 것 같다. 지금의 캥거루 엄마 vs 캥거루 딸의 대결구도에서의 냉정함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으니 말이다. 엄마는 어린 시절에 그렇게 나에게는 빛의 전사, 존경스러운 아름다운 신앙인이었다. 


이와 같이 어린 시절에 자주 나간 교회에서 <옛날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즐겨 들었던 담임 목사님들의 말씀이 내 안에 쌓이고 자라게 되었다. 목사님들의 말씀을 들으면, 사용하시는 성경 단어, 우리 나이에 맞는 다양한 지혜의 말씀, 이웃사랑의 차원에서 해주시는 말씀에서 교훈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학교 선생님들은 내가 논설문 같은 글을 제출할 때 '어휘 선택'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는데 그건 아마 이러한 말씀들을 지속적으로 답습해온 결과물 일수도 있다. 그렇게 이야기 듣기를 좋아한 나는 어렸을 적부터 <역사 이야기>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 '청소년이 읽어야 할 한국사'같은 두꺼운 책들도 고리타분하지만 곧 잘 넘기면서 읽곤 했으니 말이다. 그만큼 역사적 해석과 시각에는 관심이 지대했지만, 나는 과거에 산 사람이 아니기에 그들의 모든 사실을 접하고 해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겸손한 건지, 쫄보 간을 가진 건지는 모르겠다. 사람들이 나에게 '전공이 무엇이에요?'라고 물어보면, 어렸을 때는 허세를 부리더니 이제는 달라졌다.


학문적 내공이 성숙하지 않음을 깨닫고 '역사학'이라고 대답하지 않고 있다.

 '인문학도입니다'라고 소개한다.


어린 시절, 큰 교통사고로 아버지가 없어졌을 때, 우리 가정을 위해 기도해준 교회


그렇게 나에게 신앙에 대한 밑바탕이 되어주고, 영성적인 평안함과 안정감을 주었던 교회와의 인연. 그 인연을 이야기하자면, 또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게 된다. 무엇보다도, 교회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있는 이유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큰 교통사고를 당했을 적으로 되돌아간다. 대기업에 다니시던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고, 사람들을 좋아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와 연락이 되지 않았고, 우리는 그렇게 소식이 없는 아버지의 생사를 걱정하며 집에서 아빠의 연락을 기다렸다. 나는 그 당시에 3~4살 밖에 되지 않은 아주 어린 꼬맹이 시절이었지만, 엄마의 아주 걱정하는 모습과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우리 집에서 심방이라는 것, 작정 기도라는 것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게 무슨 일들 인지도 모르고 그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어린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아버지 찾을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한 교회 사람들의 따스한 손길이 정말 어린 시절의 기억이지만 지금도 생각난다. 엄마가 이성을 잃고 모든 생활에서 아버지를 찾을 때 우리의 가정을 지켜준 건, 사람들의 진심 어리고 간절한 기도였다. 그러한 간절한 바람 때문이었을까? 연락이 닿지 않았던 아버지의 소식이 들려왔다. 아버지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이 우리에게 전해졌고, 이내 큰 수술에 들어가신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그 당시에 우리 가족의 큰 아픔이기에 지인들에게도 자주 언급하지 않는 이야기. 나도 그러하지만, 어머니는 당시 아빠의 배우자로 너무 큰 고생을 하셨기에, 아직도 그 이야기 듣는 것을 꺼려하신다.


당시에 다녔던 병원의 이름만 들어도 몸서리를 치는 어머니를 보면,

같은 가족으로서 엄마의 상처가 느껴지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다니엘서의 말씀처럼 영원히 빛날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삶과 가정에서, 큰 기도와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해준 이웃들이 있는 장소. 성경의 말씀대로 서로를 돌아보며 신앙을 지키는 장소인 교회가 좋았다. 기도가 마법처럼 이루어지는 날들에도 좋았고, 때로는 침묵만이 응답인 기도가 들어지지 않는 날들에도 좋았다. 아버지를 다시 찾아주고, 건강하게 해 주고, 가족의 구성원으로 우리에게 큰 기둥이 되도록 그 당시의 기도를 응답해 주신 것을 평생 마음속에, 기억 속에 깊이 간직하면서 살아왔다. 이와 같이 인연이 깊다면 깊다고 할 수 있는, 교회의 식구들의 소식을 직·간접적으로 들을 때마다 나는 다른 때보다도 감정의 파동이 크게 일어났다. 좋은 일이면 안도의 감정, 안 좋은 일이면 슬픔의 감정.


 그렇게 우리의 곁에서 때로는 채찍으로 채근하시고, 당근으로 좋은 말씀을 나누어주셨던 한 목사님께서 지금 같은 시공에 없다고 생각하니 그 마지막 모습이 주는 슬픔과 헛헛함, 상실과 덧없음이 느껴지는 기분에 기운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어르신들이 떠나가시면, 철없는 우리들은 앞으로 누구를 보고 말씀을 듣고 살아가야하나에 대한 고민과 걱정도 들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으면서 지금의 슬픈 감정을 달래보고, 앞으로의 한국 교회에 더욱 큰 부흥과 발전이 일어나기를 기대해본다. 다니엘서의 말씀이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다니엘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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