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Prenzlauer Berg의 쿨한 거리 파헤치기
어디서 많이 본 적 있는 문장이다. 영어를 책으로 배워본 사람들이라면 거쳐간다는 유명한 교습서의 수동태 예문으로 등장한 유명한 속담으로, 항상 전성기만을 유지했을 것 같은 유럽과 페르시아를 넘어 이집트까지 지배했던 고대 최대의 제국도 사실 수년에 걸쳐 쌓아 올린 결과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글의 주제는 로마도, 수동태도 아니지만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바는 요즘 대세인 '힙한' 거리들도 하룻밤만에 벼락 인기를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해, 젊고 창의적인 기업가들과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는 수년간의 역사적 정체성을 쌓아 올린 지역이라는 것이다. 오늘 소개하고 싶은 곳은 유럽 문화의 신흥강자 베를린에서 히피들이 자주 출몰하는 구역, Prenzlauer Berg다.
프렌츠라우어 버그 (Prenzlauer Berg, 편의상 PB로 지칭)는 구 동독에 위치한 구역으로, 1800년대에는 양조 지구였다. 1990년 독일민주공화국 (German Democratic Republic; GDR) 정부는 이 구역의 건물은 주로 Altbau (오래된 건물이라는 뜻으로, 1949년 이전에 지어진 높은 천장과 두꺼운 벽, 마룻바닥을 특징으로 하는 건물들을 지칭)였는데, GDR는 이 건물들을 비공산주의적으로 보고, Plattenbau (고층의 근대식 콘크리트 건물)을 증축했다. 그러나 PB 구역 거주지의 재개발을 추진할 자금이 부족했던 탓에, 기존의 거주자들은 근대식 아파트를 찾아 빠져나가고, Plattenbau에 입주할 사정이 되지 않았던 거주자들과 GDR의 사상에 반대하던 이들이 버려진 건물들에 들어와 무단점유 (squat) 하게 되었다. 이후, PB는 반정부주의자와 운동가, 학생, 작가, 예술가들의 밀집 지역이 되어 동독 내 저항문화의 요람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 스쾃 컬처는 통일 이후까지 확산되어 창조적인 기업가들과 외부 투자자들을 끌어들였다. 여기서 '스쾃'은 쭈그려 앉는다는 뜻으로, 스쾃 컬처는 1990년대 베를린에서 확산되었던 무단점거운동 문화를 말한다. 전후 버려진 건물들에 노동자 계층과 예술인들, 학생들이 한데 모여서 살게 되었을 뿐 아니라, 카페나 서점, 갤러리 등을 열기도 했다. 펑크족과 무정부주의자, 히피, 예술가들이 그들만의 문화를 형성하였고, 2009년에 마지막 펑크 스콰터들이 (Tacheles) 경찰에 의해 강제이주 조치를 받음으로써 이 운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몇몇 스콰터들은 점유하던 아파트와 상점의 소유권을 인정받게 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개인 부티크들과 작은 갤러리, 채식카페, 영어 서점 등 히피들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으로 변모하였다. 힙한 아시아 퓨전 레스토랑과 특색 있는 노천카페들, 빈티지 샵, 베를린 장벽의 붕괴 가운데 세워진 베를린 패션 브랜드 Thatchers, 주말 장터에서 시작하여 지역구의 교육과 문화, 환경에 이바지하는 모토를 가진 Buchbox, 아프리카의 가죽공방들과 협업하여 지속 가능한 패션을 추구하는 Abury의 유일한 플래그쉽 스토어 등 베를린에서만 만날 수 있는 끝없이 펼쳐지는 상점들과 건물들 들어선 길을 걷다 보면 모든 일정을 뒤로한 채 이곳에만 며칠을 탐험하고 싶은 욕구가 타오를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에 들어선 기업들은 왜 PB를 선택하게 된 것일까? 그저 임대료가 싼 탓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경제학자 히벨스와 알스트는 "베를린의 창조 클러스터: 프렌츠라우어 버그와 크레즈버그를 통해 본 기업가 정신과 장소의 가치" (Creative clusters in Berlin: entrepreneurship and the quality of place in Prenzlauer Berg and Kreuzberg)라는 논문에서 PB의 성공요인으로 창조적 기업가 정신과 지역 네트워크의 결합과 동네의 분위기가 가지는 '상징적 가치' (the neighborhood’s look and feel)을 제시한다.
창조 클러스터란, 경제주체의 창의성이 극대화되어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창조경제시대에 이를 촉진하고 확산하는 창조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한 전략 중 하나로, 산업 클러스터를 형성하여 창조적인 경제주체 (창조 계급)을 결집시킨다는 기능을 가진다. 창조 도시는 창조계급이 선호할만한 환경이 조성된 도시로, 창조적 인력이 모여든 후, 기업들이 이들을 유치하기 위해 창조 도시에 운집한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한다. 창조 클러스터와 창조 도시는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하는 방법론적인 면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창조 생태계 조성을 목표로 한다는 공통점을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적 기업가들이 모여든 PB의 요인이 동네의 독특한 분위기와 아름다운 건물양식이라는 점은 어떻게 설명이 가능할까?
이 논문의 저자들은 기존에 있었던 창조 클러스터가 주는 경제적, 직접적(정보의 공유, 거래비용 감소, 특화된 노동력의 공급 등)인 효과보다는 Prenzlauer Berg라는 공간이 갖는 상징성으로 인해 많은 소상공인들과 기업가들이 모여들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구역의 기업가들과 진행한 인터뷰를 통해, 연구팀은 Prenzlauer Berg의 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높은 수용도, 독일 통일 이후에도 동독과 서독의 대조적 이미지가 공존하는 Prenzlauer Berg 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높게 평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과거 주변부와 대안 문화의 상징이던 PB는 자신의 역사적 특징을 유지한 덕택에 21세기의 새로운 대안 그룹인 창조계급이 기업가 정신을 발휘하는 무대라는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기능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인터뷰에서 한 응답자는 다른 상인들과 특별한 교감이 없어도 그들의 존재 자체가 창조적인 이미지와 동네 분위기를 형성한다고 답변했다. 이는 처음 PB가 가진 공간적 특성이 창조 계급의 밀집으로 인해 확대되고 재생산된 결과를 가져온 것을 알 수 있다. 로컬리티가 가지는 상징성은 모든 기업가들에게 중요한 것으로 드러났다. 낮은 임대료와 최소한의 규제도 한몫 하지만, 서비스 산업에 종사하는 소상공인들은 패셔너블한 건물 외형과 동네가 주는 창조적인 이미지가 자신들의 브랜드 이미지와 맞아떨어진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주의가 Prenzlauer Berg라는 구역을 기반으로 형성된 것이다.
PB가 갖는 의미는 창조 클러스터와 창조도시 사이의 논쟁에서 고려해야 할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다는 데 있다.
물리적 장소와 무형의 분위기, 미적 가치가 창조적 기업가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혹자는 Prenzlauer Berg는 시대적, 문화적 타이밍이 맞아떨어져 이루어진 결과물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구현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정책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모종린 교수는 "골목길 미래에 경제학이 필요한 이유"에서 성공적인 골목길들이 가진 경제학적 포뮬러인 C-READI를 제시한다. 성공한 골목상권은 인프라와 임대료, 기업가정신, 접근성, 도시 디자인, 정체성이라는 6가지 요소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특히 PB는 정체성이라는 요소가 도시 디자인과 인프라로, 또 기업가정신을 유도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케이스를 활용하여 우리나라도 지방정부나 도시의 공공정책으로 창조계층을 인위적으로 유치하려는 전략보다는 창조계급이 중시하는 가치와 정체성이 발현될 수 있는 '공간적 여유'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참고 자료
- 골목길 미래에 경제학이 필요한 이유. 골목길 경제학자.
- 라이프스타일 도시. 모종린.
- 창조도시와 창조클러스터 전략. 고정민.
- Creative clusters in Berlin: entrepreneurship and the quality of place in Prenzlauer Berg and Kreuzberg. Barbara Heebels and Irina van Aalst.
- What Squatting Can Teach Us About Wasted Space. Citylab.
- The Squats of Berlin. Huffington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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