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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Oct 09. 2019

갑질 하는 영국 날씨

아니 날더러 대체 어쩌라는 거야

해가 방긋 날이 너무 좋아 빨래를 해서 널었다. 햇살에 꾸덕꾸덕 말라가는 빨래는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다. 자외선으로 살균까지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스코틀랜드에서는 햇볕 한 줌이 너무 귀해 날이 좋을 때는 무조건 즐겨야 한다. 차를 한 잔 해도 가든에서, 없던 계획도 만들어 야외에서 친구도 만나고. 하다못해 이렇게 빨래라도 밖에 말리며 그 이로움을 널리 사용해야 한다. 평균 일조량이 제로에 가까운 12월이 올 때까지 열심히, 최선을 다해.

 



갑자기 세차게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분명 일기예보에는 하루 종일 햇살과 구름 이미지만 있고 비올 확률은 20%도 되지 않았는데. 나는 곧 신데렐라에 빙의되어 계모가 내리는 명령을 수행한다.


"신데렐라! 당장, 빨래 걷어라!"

"네, 어머니!"


버선발로 뛰쳐나가 애덤 스미스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경지로 빨래를 걷는다. 아차, 급히 뛰어나온 터라 빨래 바구니가 없다. 하는 수 없이 아직 젖어 있는 빨래들을 내 어깨에 포개 얹고 집으로 들어온다. 여기저기 말릴 만한 곳을 찾아 한데 뭉친 옷과 수건을 펼쳐 넌다. 우리 집에 빨래건조대가 있던가? 없지. 몇 년 전에 버렸지. 계단 난간과 의자 뒤 등받이가 형형색색으로 물들어 간다. 휴, 다 널었다.




한 시간 뒤, 비가 그치고 다시 해가 뜬다. 창밖을 바라보다 무시한다. 곧 비가 올 텐데 뭐. 하지만 10분이 지나자 햇살이 더욱 강렬해진다. 눈이 부시다. 나는 고뇌에 빠진다. 빨래가 온 집안에 널려 있는 건 보기에도 안 좋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엉망으로 만들어 놓을 가능성도 크다. 만져보니 가지고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의 수분감이 느껴진다. 전혀 마른 것 같지 않다.


"신데렐라! 파티 갔다 올 동안 빨래 다 말려놔라!"


계모와 언니들의 목소리가 들리며 내 손은 자연스레 빨래 바구니로 간다. 집 구석구석에 펼쳐진 그것들을 다시 담아 밖으로 나간다. 귀찮긴 해도 이 햇살을 포기할 순 없다. 정성스레 집게 두 개씩 집어 바구니 안 물체를 들어 올려 빨랫줄에 집는다. 얘들아, 얼른 마르렴. 제발, 부디.




비, 비가 또 온다. 이번엔 울고 싶다. 다시 널어놓은 지 20분도 안 된 것 같은데. 마음을 가다듬는다. 스코틀랜드의 날씨를 믿어보기로 한다. 분명히 5분 후 아니 10분 후엔 또다시 해님이 뜰 것이다. 그런데 안.뜬.다. 아마도 내일의 태양이라 내일 되어서나 뜨려는가 보다. 하는 수 없이 빨래를 거두어들인다. 힘이 쪽 빠진다. 집안에 다시 널 기운이 없다. 그래도 가족들을 생각하며 힘을 낸다. 내일 입고 가야 할 옷일 수도 있으니까.


허, 해가 뜬다. 이런 미친!  

이 나라에서는 날씨가 갑질을 한다.  


"신데렐라! 다시, 빨래 널..."


안 해, 안 한다고. 햇살이고 나발이고 안 한다고!




* 갑질에 대항하여 꿋꿋이 집안에서 말렸던 빨래는 다음날까지 마르지 않았고, 그날의 해는 어둠이 찾아올 때까지 주욱 떠 있었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것이 스코틀랜드의 일상이라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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