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셧다운 1주차에 들었던 코로나 단상 6가지
학교에 못 가고 집에 머물러야 하는 영국에 사는 아이들이 직접 무지개를 그려 창문에 붙여 놓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고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웃음을 주고자 응원하는 차원에서 시작된 일종의 캠페인 같은 것이다. 매일 아침 개와 동네를 산책할 때마다 무지개 그림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걸 발견한다. 우리 딸도 오늘 예쁘게 그려서 거실 창문에 붙였다.
무지개 그림 하나 그린다고 6개월 걸릴 코로나 사태 안정화가 3개월로 줄어들진 않겠지만 지금은 모두가 한 마음으로 힘을 내고 응원하는 게 중요한 시점이다. 아이들의 예쁜 그림만큼 하루빨리 예쁜 일상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오늘부터 우리 집은 식사 시간마다 한 사람 당 냅킨을 1/4씩만 쓴다! 알겠나!"
냅킨 한 장을 펼쳐 가로 세로로 잘라 4 조각으로 만들며 외치자 남편과 딸들이 네 하고 대답을 한다. 영국 왕세자도 코로나에 걸렸단다. 이 마당에 이 나라 정부가 하는 모양새를 보자니 코로나 바이러스는 쉽게 잠잠해질 기미가 없어 보인다. 각자도생으로 장기전에 대비해야 할 것 같다. 몇 주 전 화장실 휴지며 냅킨이며 티슈 같은 걸 평소보다 조금 더 사놓긴 했지만 소모품은 말 그대로 소모가 되므로 언젠간 바닥이 날 것이다. 아껴 쓰기로 했다.
우리 집이 평소에도 냅킨이나 휴지를 다른 집보다 많이 쓴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미국 살 때부터 들인 잘못된 습관 탓에 주방에서 행주 대신 키친타월에 물을 묻혀 식탁을 닦았다. 식사 시간에도 한 사람 당 한두 장 씩 냅킨을 써대는 바람에 밥을 먹고 나면 쓰레기통이 온통 하얀색으로 꽉 차곤 했다. 싱크대를 닦을 때도 바닥 청소를 할 때도 냅킨, 휴지 등 1회용 도구를 사용했다.
입으로는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고 환경에 관심이 많다고 떠들면서 정작 어떠한 작은 실천 조차 못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코로나를 계기로 변하기로 했다. 휴지도 아끼고 쓰레기도 줄여 보자. 5년 전 한국에서 사 온 극세사 천을 꺼냈다. 반갑다, 행주!
아이들 학교가 이번 주부터 문을 닫았다. 시간이 많아진 덕에 이때다 싶어 미뤄 두었던 구몬수학과 기탄 국어를 둘째 딸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틈틈이 그림도 그리고 만들기 아이디어도 짜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런 활동이 아니더라도 무조건 놀기만 할 수는 없다. 학교에서 구글 팀으로 내준 과제를 매일매일 해서 제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름 과목별로 다양하게 내준다. 체육 시간엔 유튜브를 보며 운동을 따라 하라는 내용도 있다. 여덟 살 딸내미는 선생님이 하란데로 열심히 한다. 중딩 딸도 컴퓨터로 과제를 하고 온라인으로 학교 플루트 수업도 받는다. 남편은 화상으로 수업을 찍어 올리고 화상 미팅을 한다.
인터넷이 오늘날처럼 발달하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나 싶다. 갑작스럽게 닥쳐서 준비도 없이 온라인으로 모든 걸 하려니 부하가 걸리기는 하지만 코로나 사태가 잠잠해지고 나면 우리의 일상은 전반에 걸쳐 여러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디지털 플랫폼은 점점 더 발전할 테고 지난해 출간된 책 제목처럼 진짜 "직장이 없는 시대"가 올 지도 모를 일이다.
온 가족 함께 있는 시간도 좋기는 한데 개인적으로는 학교도 있고 직장도 있어 낮이 되면 온 가족이 나갔다가 저녁에 다시 만나는 걸 선호한다. 나만의 시간은 소중하니까. ^^
햇볕이 좋아 빨래를 밖에 널었는데 비가 왔다. 얼른 걷어 안으로 들어왔다. 옆집 마가렛네도 빨래를 널어놓은 게 보였다. 가서 비 온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가지 않았다. 요새 마가렛이 기침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착잡했다. 마가렛네 가족은 우리 동네에서 누구보다도 친하게 지내는 이웃인데 기침을 한다는 이유로 빨래 걷으란 말도 못 하다니. 이기적인 내 마음에 실망했다가도 나는 엄마이므로, 우리 가족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므로 그리고 젖은 빨래야 언젠간 마를 것이므로 기꺼이 이기적이 되기로 했다. 문득 (고)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오는 유명한 글귀가 떠올랐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은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게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도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코로나가 장기화되어 사람들이 옆 사람을 바이러스 덩어리로만 느끼게 되는 건 아닌지....... 아니다. 아닐 것이다. 내 비약이 지나쳤다. 몇몇 그런 사람들이 인종 차별 폭행을 하고 혐오 발언을 한다 해도 이 세상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훨씬 더 많음을 안다. 다음에 마가렛네 빨래가 비를 맞고 있으면 뒷문을 두드리고 바디랭귀지로 얼른 걷으라는 액션을 취하고 오리라. 아차차... 그전에 그녀의 기침이 나았으리라.
코로나 치료제로 여러 약들이 거론되고 있다. 신약 개발은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기존에 있던 에볼라 치료제나 에이즈 치료제 등을 우선적으로 쓰고 있나 본데 그 속에서 아주 익숙한 이름을 듣는다. 클로로퀸, 항 말라리아제. 이럴 수가! 자가면역질환인 루푸스가 있는 내가 매일 먹고 있는 약이다. 만약 내가 코로나에 걸리면 평소데로 약을 먹으면 금세 나으려나? 남들보다 덜 걸릴까? 그 누가 알겠나. 이 듣도 보도 못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해. 하루빨리 적절한 치료제와 백신이 나오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 동네에는 작은 마트가 두 군데 있다. 작긴 하지만 웬만한 식료품과 생필품을 갖추고 있어 굳이 큰 마트에 가지 않더라도 생활이 가능할 정도다. 동네 마트라 가격이 조금 비싼 탓에 평소에는 우유나 빵 같은 걸 사러 갈 때만 이용하곤 했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온 동네 주민이 두 마트를 이용하는 횟수가 엄청 늘었다. 그래서 어쩔 땐 과일이며 야채며 빵, 우유 같은 게 금세 동나기도 하지만 다행히 다음날이면 채워진다.
우유가 떨어져 오늘 마트에 갔다. 여전히 손세정제 같이 위생 관련 제품들과 와인, 위스키 같은 알코올류*는 재고가 없고 평소보다 선반이 헐렁하긴 했지만 모든 식품들이 꽉 채워져 있었다. 휴지 코너에도 화장실용 휴지와 티슈가 남아 있었다.
* 술을 만드는 생산라인을 손세정제 같은 걸 만드는 데 사용한다고 해서 술 생산량이 줄었단다.
요즘은 큰 마트에 가질 않기 때문에 도시 상황은 잘 모른다. 어쩌면 작은 시골 동네라 (특히 잉글랜드가 아니고 인구 적은 스코틀랜드라)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으나 물건이 차 있으니 사재기를 할 필요가 없다. 딱 필요한 것만 사 가지고 오면 된다. 모두가 그렇게 하면 사재기 같은 비이성적인 행동은 안 일어날 테다. 하지만 한두 명이 시작하면 이성이 마비되는 건 순식간이다.
며칠 전 코스트코에 갔다가 내가 했던 행동도 마찬가지였다. 사람 없을 때 간다고 문 여는 시간에 맞춰서 갔는데 이미 장사진을 치고 있는 대기 줄을 보자 첫 번째로 이성을 잃었다. 안에 들어가자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주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보고 호흡이 가빠졌으며 물건이 쉭쉭 선반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니 사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마구 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정신을 차리고 이성을 찾아야 한다. 나 혼자 잘 산다고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자랑스런 내 조국 대한민국보다 훨씬 열악하긴 하나 이곳에서도 NHS 의료진들은 연일 고생하며 환자를 보살피고 있다. 그들을 위해, 노약자들을 위해, 그저 나보다 빠릿빠릿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더 이상 사재기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