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의미가 변하고 있다
올여름 우리 동네에는 작은 붐이 일었다. 바로 집 외벽을 새로 시공하는 붐이었다. 스코틀랜드 작은 시골마을 올드타운에 지어진 집들은 대부분 70-80년 되었다. 웬만한 집들이 내부공사는 했을지언정 외부는 손을 대지 않고 살아온 터라 사실 올드타운의 첫 이미지가 썩 좋지는 않았었다.
세월의 무게를 온몸(아니, 온 벽)으로 받아 안은 집들은 색깔이 바래다 못해 우중충한 잿빛이었다. 이곳에 이사 올 당시 말 그대로 오래되고 낡은 이 분위기를 내가 참아낼 수 있을까 걱정도 했었지만 그때 우리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몇 년을 살다 보니 차차 적응이 되어갔지만 밖에서 우리 집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안타까운 고풍스러움(?)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올여름 우리 동네의 여러 집들이 집 외부를 단장하기 시작했다. 코로나 19로 인한 록다운 이후, 놀러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여름휴가 시즌에 사용했을 돈을 집에 부은 것이다.
우리 골목이 가장 앞장섰는데 열 집도 넘게 외벽 공사를 했다. 단순히 페인트칠만 하는 것이 아니다. "러프 캐스트 시공"이라 불리는 이것은 집 벽 전체에 색깔이 있는 회벽칠을 한 후 작은 돌들을 뿌려서 붙이는 시공법이다.
앞집과 바로 옆집이 할 때는 부러워하기만 하다가 다른 쪽 옆집도 하자 우리 집도 꼭 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에 사로잡혔다. 우리는 테라스 하우스의 맨 끝집이라 두 면만 하면 되는 다른 집들과 달리 세 면을 해야 해서 옆집 비용의 두 배가 드는 탓에 며칠을 고민했으나 하는 김에 같은 업체에서 하면 괜찮겠다 싶었다. 왜냐하면 이런 시공을 하는 업체도 한두 군데가 아닌 데다가 일일이 견적 받고 알아보는 것도 시간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 어차피 놀러도 못 가는데 집에 새 옷이나 입히자!'
지난여름 한국 가려고 비행기를 예약했으나 눈물을 머금고 환불을 받아야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우리 집도 동네 붐에 동참하게 되었다.
우리 집은 세 면을 해야 했기에 4-5일의 기간을 예상하고 공사에 들어갔다. 스코틀랜드의 특성상 비가 자주 오는 탓에 그것까지 감안하면 더 걸릴지도 몰랐으나 다행히 5일 후에는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70년 만에 새 옷을 입은 우리 집!
우중충한 때깔을 벗고 (사실은 덮고) 약간 회색빛이 도는 하얀 옷으로 갈아입었다. 동네 다른 집들은 베이지색으로 했기 때문에 우리 집이 더욱 눈에 띄게 되었다.
벽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렇게 작은 돌들이 알알이 박혀 있다. 사실 이 시공법을 현재에는 거의 안 쓴다고 하는데 스코틀랜드에서는 아직 인기 있는 방법이란다. 물론 예산이 더 충분했다면 더욱 멋진 외부용 돌을 붙일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는 이 정도에서 만족해야 했다.
지붕은 손을 보지 않은 탓에 낡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70년의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그래도 새 옷을 입히고 보니 그동안 집을 볼 때마다 느꼈던 묵은 체증 같은 감정들이 쑥 내려가는 것 같다. 과거의 외벽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졌다.
동네에 시공 붐이 일었던 것이 비단 올여름 쓸 돈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라 생각한다. 코로나 이후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다 보니 오래 있는 공간을 꾸미고 고치는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외벽 공사 같은 큰 공사를 한 집들도 많았지만 울타리를 다시 칠하고 고치거나 새로 세우는 집들도 무척 많았다. 또한 가든용 의자나 테이블을 두는 등 가든을 좀 더 편한 공간, 쉼의 공간으로 꾸미는 집들도 부쩍 눈에 띄었다.
우리 집도 공사를 하기 전에 오래된 울타리를 새 페인트로 칠해 주었다. 일꾼이 둘이나 되어서 가뿐히 칠할 수 있었다. 물론 노동의 대가를 지불했지만. ^^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에 2년을 살다가 시골마을로 이사 왔을 때 솔직히 맘껏 행복할 수가 없었다. 경제적 여건에 맞추어 이사를 온 상황이 어쩐지 도심에서 밀려난 자가 된 기분이 들었고 그로 인해 감내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10분이었던 남편의 출퇴근 시간이 1시간 20분으로 늘어났으며 애들도 새 학교 새 친구에 적응을 해야 했으니.
하지만 코로나 판데믹 이후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비록 집은 아담하지만 널찍한 가든(영국에서는 가든이라고 하기 때문에 저도 그렇게 부르겠습니다)이 있는 덕에 우리 가족은 답답함을 모르고 록다운 기간을 보낼 수 있었다. 매일 오후 4시가 되면 온 가족이 가든에 나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햇살을 즐겼다. 집에서 몇 분만 나가면 펼쳐지는 자연을 여기저기 누비며 날마다 산책을 하기도 했다. 만약 에든버러에 살았다면 (당연히 가든이 없는 집에 살았을 것이므로) 겪을 수 없는 경험들, 지금은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제 집은 더 이상 옛날의 집이 아니게 되었다. 집이자 오피스이자 휴식의 공간까지 담당해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아니지, 돈만 있다면야!) 더 넓고 큰 집으로 이사를 가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으니 가능한 부분을 상황에 맞게 고치고 바꾸며 살아가 보려고 한다. 4년 동안 우리에게 보금자리를 내어준 오래된 집아, 앞으로도 같이 잘 살아보자꾸나. 이쁘게 단장 잘 해줄꾸마.
* 다음 번엔 70년된 영국 시골집 가든의 변신에 대해서 써볼 계획입니다. 놀라운 변신을 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