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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써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

기록의 힘

by 영글음

브런치는 나에게 네 번째 블로그다. 2009년 한국을 떠나면서 <다음> 블로그를 시작했고 어쩌다 보니 <네이버>, <티스토리>도 운영했다. 그곳에 아이를 키우다 벌어지는 일상의 조각을 비롯해서 외국 살이, 서평, 여행기 같은 이야기를 써서 올리곤 했다. 쓸 때는 열심히 썼지만 하도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다 보니 떠나온 블로그의 글들은 관리도 잘 안되고 기억 속에서도 희미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옛날에 썼던 서평을 찾아보려고 급히 뒤적거리고 있었는데 글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닌가. 지금은 고등학생이 되어 한창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첫째 딸이 5살 때의 이야기…….라고는 하는데 글 속의 등장인물이 너무 생소해서 어이없는 웃음이 터졌다. 대체 뉘댁 아이신지?


그리고 계속 글을 써야 하는 이유가 확실해졌다. 당시의 글을 요약하여 옮겨 본다.






며칠 전 아침, 남편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똥강아지네 어린이집으로 향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다른 날과 사뭇 다르게 차 안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아이가 뜬금없이 한 마디 던집니다.


"엄마, 사람은 말을 꼭 해야 해."

"말? 그렇지, 말을 해야지. 근데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인어공주는 바다 마녀에게 목소리를 팔아서 말을 할 수 없었잖아. 너무 불쌍해."


아하, 얼마 전 만화영화에서 보았던 인어공주 때문이었군요! 눈을 내리 깔고 세상 불쌍한 목소리로 인어공주를 안타까워하는 딸의 모습에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꾹 참고 물었습니다. 만약 바다 마녀가 와서 목소리를 팔라고 하면 어쩔 거냐고요.


"절!~~~~~~~~~대로 안 된다고 할 거야."

"왜? 마녀가 공주로 만들어 주는 데도?"

"그건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으니까. 오늘은 어린이집에 가방을 메고 가겠다는 거나 차 안에서 동화 CD 틀어달라는 말 같은 거? 또 책을 본다는 말도 해야 하고 산토끼 노래도 불러야 하거든."


공주도 싫답니다. 절대로의 ‘절’ 자를 한 5초간 끄는 걸 보니 하고 싶은 말이 많긴 많은가 봅니다. 딸내미가 바다 마녀에게 목소리를 팔면 아마 제가 더 힘들어질 것 같습니다. 딸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릴 방법이 줄어드는 거니까요. 인어 공주가 되겠다면 제가 두 팔 걷어붙이고 말려야겠어요. ^^






이 글을 읽고 나니 잠시 동안이지만 완전히 잊고 있었던 그 시절로 돌아갔다. 이렇게 지나왔구나. 딸은 저런 생각을 하며 컸구나. 지금은 스스로 바다 마녀에게 목소리를 갖다 바쳤나 싶을 정도로 말이 없는 편인데, 어릴 때는 말하기를 좋아했었구나. 기록해 놓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순간을 다시 글로 만나는 일은 먼지 쌓인 다락방에서 작은 보물을 찾은 기분이었다. 돈 주고 사려해도 아무데서도 팔지 않는 보물.


딸을 불렀다.


"있잖아, 네가 인어공주라고 쳐. 바다 마녀가 너를 진짜 공주로 만들어 줄 테니 목소리를 팔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10년 전과 꼭 같은 질문을 했다.


"공주 싫은데요."


0.1초도 안 걸려 답이 돌아왔다.


"아니, 이 질문의 포인트는 목소리야, 목소리!"

"말을 안 해도 메신저나 문자메시지로 대화할 수 있잖아요."


그래, 너 잘났다. 엄마는 옛 시절로 소환되어 우리 딸이 그럴 때가 있었구나, 하며 감상에 젖어 있는데 너는 다시 현실로 엄마를 잡아당기는구나. 뭘 바라!


딸에게 예전에 쓴 글을 보여주었다. 네가 어릴 땐 이랬다고. 그런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딸이 허리를 반으로 폈다 접으며 웃느라 뒤로 넘어갔다. 또 한 번 무릎을 쳤다. 글을 계속 써야겠다고. 고등학생 딸의 이야기가 10년 후가 되면 새로운 웃음으로 승화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내 키보다 8cm가 더 커버린 딸과 오랜만에 산책을 다녀왔다.



바다 마녀에게 스스로 목소리를 던져주고 말을 잘 안 하는 첫째 딸과 우리 집 강쥐 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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