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도 아주 꽉꽉!
나이 들면 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어져. 하나도.
3년 만에 만난 엄마 입에서 나온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줄 알았다. 7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면 일상이 다 시시해지고 특별히 가슴 뛰는 게 없어진다는 말이 퍽 아프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엄마는 친구를 만나는 일도 귀찮다고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주말마다 '무박 2일 등산'을 갈 정도로 동호회 활동을 열심히 했고 (심지어 암벽등반까지!) 동창회에 나가면 술 한 하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했다. 그랬던 엄마가 삶에 재미가 없단다.
어떻게 대꾸를 해야 하나 망설였다. 아직 그 나이가 되어 보지 않았으니 내가 뭐라고 하든 위로가 될 수는 없겠지. 나도 나이를 먹으면 그렇게 될까? 여러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번져나가려던 찰나,
"그런데 내가 요즘 얘 때문에 살잖니!! 일루 와봐."
엄마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가 있었다. 나를 잡아끌어 보여준 휴대폰 화면으로 한 남자가 튀어나왔다. 훤칠한 키에 옆가르마를 중심으로 단정하게 올린 머리, 눈을 초승달 모양을 하고 웃고 있는 임. 영. 웅. 이었다.
영국 살면서 포털 뉴스에서나 보았던 그의 이름. 트로트 경연대회에서 1등을 한 가수라는 것은 알았지만 노래를 들어본 적은 없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부터였다. 엄마는 시험을 코앞에 둔 수험생에게 족집게 과외를 하듯 유튜브 영상을 하나씩 틀며 그게 언제 적 방송이었는지, 시청자들의 반응은 어땠는지 종합해 설명했다. 핵심 내용은 두세 번 반복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덕분에 하루 만에 그의 노래를 모두 들었다.
"영웅님은 트로트뿐 아니라 모든 장르를 다 소화하는 가수야."
영웅님? 엄마 입에서 이런 표현이 나올 줄이야! 오랫동안 조용필을 좋아했으면서도 단 한 번도 "용필님"이라는 단어는 쓴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내가 웃음을 터트리자 엄마는 아이처럼 따라 웃었다.
엄마 집에 머문 지 오늘로 열흘 째다. 그동안 신기한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다. 일단 엄마의 손에서 휴대폰이 떠나질 않는다. 거의 중독 수준이다. 대부분은 유튜브로 임영웅의 노래를 감상하거나 연예 채널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트로트 관련 연예가 소식을 줄줄이 읊는다. 전문가가 따로 없다.
"너 스트리밍이 뭔지 알아? 엄마 그거 하잖아!"
팬들 사이에서 하도 스트리밍, 스트리밍 하길래 그게 뭔지 공부하고 음원 서비스에 가입했다는 엄마다. 그뿐이 아니다. 여러 어플을 돌아다니며 투표를 한다. 투표를 할 수 있는 시간 간격이 정해져 있어 한 시간에 한 번씩 해야 한단다. 팬카페 활동은 물론,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에도 들어가 OO님, OO님 하면서 그들과 한마음, 한뜻이 되어 정보를 교환한다. 얼마 전 가수 크러쉬와 임영웅이 함께 불렀다던 랩을 듣는다. 나보다 더 신세대다.
BTS의 팬클럽 아미를 바라보는 심정이 이와 같을까. 엄마의 모습이 여전히 낯설지만 떨어졌던 내 심장은 진작에 올라와 붙었다. 웃음이 떠나지 않는 엄마의 얼굴을 보니 바다 건너 사는 무심한 딸보다 그가 더 필요한 존재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행이다. 그가 있어서.
※ 비단 저희 집만의 풍경은 아닐 테지요.
어르신들의 하루를 채워주는 트로트 가수분들의 활동을 열렬히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