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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Feb 22. 2017

영원한 이방인? 나는 거부한다

우리가 영국 시골마을로 간 까닭

자동차가 우회전을 하자 양 옆으로 초록빛 밭이 넓게 펼쳐진다. 조금 더 지나니 고르게 땅을 갈아엎어놓은 고동색 흙밭이 나온다. 멀리 야트막하게 드러누운 산은 모든 풍경 뒤에서 기꺼이 배경 역할을 맡은 것 같다. 도로 가장자리를 따라 하늘로 뻗은 나무들은 칠팔십 년은 족히 돼 보인다. 들판 한가운데 농장이 서 있고 한가롭게 꼬리를 돌리며 풀을 뜯는 말과 소가 여기저기 퍼져 있다. 

            

순간, 헛웃음이 세어 나온다. 허, 내가 이런 시골로 이사를 왔단 말이지......? 그것도 동양인 하나 없는 작은 시골마을로. 잘 한 일인가, 후회해도 소용없다. 우리 가족은 영국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 한가운데에 살다가 지난해 8월 도시 외곽에 작은 집을 샀다. 생애 첫 내 집! 영국 땅을 밟은 지 2년여 만의 일이다. 


     




주변 사람들은 말했다. 내 나라 아닌 외국에서 사는 우리는 결국 영원한 이방인이라고. 그냥 이방인이라고 했으면 그런가 보다 했을 텐데 ‘영원한’이라니. 내가 죽을 때까지 영국에 산다면 평생 이방인으로 살아야 한단 뜻이었다. 아무렇지 않다가도 불쑥 이 단어가 떠오를 때면 물 없이 떡을 먹다가 급체를 한 기분이 들곤 했다. 숨이 콱 막히고 가슴을 탕탕 치고 싶을 만큼 답답했다. 여기서는 먹을 수 없는 순댓국과 콩나물국밥 같은 음식이 떠올랐다. 이게 옳은 선택이었는지, 다른 선택지가 있긴 했는지 묻고 또 물었다.    

  


고백 하나 해볼까.      


지난 2년 간 나는 허물어지고 있었다.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남편은 영국에 직장을 구했다. 몇 개월 간 이어진 구직활동 끝에 잡은 직장이라 처음엔 뛸 듯이 기뻤지만 이곳에서의 적응이 쉽지만은 않았다. 어떻게든 뿌리를 내려 보겠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러면 그럴수록 밖으로 튕겨져 나가는 것 같았다. 자주 눈물이 났다. 걷잡을 수 없는 우울함이 반복적으로 몰려왔다.   

    

남편이 직장만 구하면 좀 여유롭게 살 줄 알았는데 미국이나 한국에 비해 낮은 급여, 높은 세금, 비싼 월세 때문에 영국에선 그럴 수가 없었다. 어느 마트에 어떤 물품이 싼 지, 쿠폰 활용법 같은 정보는 필수다. 하지만 다들 그렇게 살고 있지 않나....... 나는 도대체 무얼 원했던 것일까. 삶의 가치는 부를 축적하는 데 있지 않다고 젊은 날 지인들에게 얼마나 되뇌었던가. 그렇게 말할 때 스스로 꽤 멋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모두 ‘구라’였음이 드러나 버렸다. 나는 모순투성이였다.   

   

관계 맺기도 문제였다. 영국 사회 어디에든 속하고 싶었다. 끈끈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적극적인 성격을 무기로 하여 저녁에 모이는 합창단도 기웃거리고 영국 교회도 가봤지만 마음은 늘 허전했다. 잠시 머무는 여행자에게 베푸는 친절은 흔하다. 그렇지만 자기의 테두리 안에 끼워줄지 말지가 연결되면 이곳 사람들은 대개 머뭇거리고 관찰을 한다. 가까운 사이가 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처음에는 몰라 당황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영어. 아이의 같은 반 학부모들과 여러 번 어울렸지만 여러 명이 속사포로 쏟아내는 영어 대화에 자연스레 끼어들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점점 작아졌다.       


낯선 곳에서는 두 아이들도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성격이 급한 나는 기대치보다 더디게 적응하는 아이들에게 자주 화가 났다. 한 편으로는 이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서였던 건지도 몰랐다. 경제적인 상황은 뒤로 하더라도 교육 시스템은 한국보다 나은 것 같으니 여기 사는 게 이득이라는 명제를 참이라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고 할까. 엄마로서의 욕심은 끝이 없었고 그건 나 자신을 갉아먹는 좀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허물어져 가다가 정신 차리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도시 외곽으로 집을 사서 이사 가자고 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이제 반 친구들과 돈독해졌는데 전학을 가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판이었다. 모기지를 받는다 해도 어느 정도의 보증금은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게 무슨 돈이 있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에든버러에서 40분 정도 떨어진  시골마을을 하나 찾아냈다. 주민 3000명 정도 되는 작은 마을이었다. 에든버러는 월세나 집값이 비싼 편인데 도시를 벗어나니 가격이 확 떨어졌다. 


집을 몇 군데 보러 갔다. 적응도 힘들었지만 변화는 더 두려웠던 터라 집 구경을 간 건 순전히 남편을 배려하는 차원에서였다. 정부 개발로 조금씩 커지기 시작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주변 들판에는 새집 공사가 한창이었지만 우리가 보러 간 집은 오래된 타운에 있었다. 마을에 들어서자 황톳빛 벽 색깔 때문인지 분위기가 우중충해 보였다. 어쩐지 마을 전체가 침체돼 보였다. 여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거리를 지나가는 마을 사람이 우리에게 ‘하이’라며 인사를 했다. 얼떨결에 웃으며 '하이'를 내뱉었다. 모르는 이에게 인사를 받는 게 얼마만의 일인가! 미국을 떠난 후 처음이었다. 앞마당에서 언쟁하듯 소리를 높여 대화하던 남자와 여자가 우리가 지나가자 대화를 멈추고 활짝 웃으며 또 '하이' 한다. 나도 '하이' 했다. 뭐지 이 사람들? 낯선 이에게도 하이 하이 하는 사람들 앞에서 마음의 빗장이 풀어졌다. 우중충하고 침체돼 보이던 분위기가 고즈넉함으로 바뀌고 있었다. 서너 번 더 집을 보러 다녔다. 우리는 뒷마당이 딸린 아담한 크기의 테라스 하우스*를 덜컥 사버렸다. 마을이 생긴 이래 최초로 거주하는 동양인이라는 타이틀도 함께.


*테라스 하우스(Terraced House): 2층 집들이 나란히 서너 개씩 붙어 있는 집의 형태.  미국에서는 타운 하우스(Town House)라 부른다.


아이들 학교 가는 길 - 학교는 집에서 3분 거리에 있다. 


여전히 영국 사는 게 힘든 부분은 있다. 집수리를 한다고 견적을 받았는데 우리가 외국인이라 비싸게 부른 건 아닐까 의심스럽다. 영어 실력도 하루아침에 나아질 리는 만무하다. 한두 명과의 대화는 괜찮은데 여러 명 사이에서는 말 대신 입꼬리를 올리며 크게 웃어야 한다. 40분씩 운전해서 에든버러까지 가지 않으면 쌀이나 배추도 못 산다. 자장면 시켜먹을 중국집 하나만 있었으면.......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었을 때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면 어쩌나....... 한국말은 잊지 않으려나....... 


하지만 아이들은 친구를 금방 사귀었다. 은행과 한국 가족의 도움을 받았기에 매달 갚아야 할 돈이 있지만 비싼 월세를 내는 것보다는 조금 여유가 생겼다. 내가 잘 못 알아들어도 투박하고 정다운 이웃들은 말을 걸고 관심을 쏟고 차를 한잔 내어준다. 배려를 해준다. 2층 창밖으로 보이는 들판, 뒤뜰에서의 바비큐 파티, '후후후'하는 새소리, 참 포근하다. 이사 온 후 우울한 감정은 사라졌다. 

 

결국 선택의 문제가 아닐까? 외국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거 하기 싫으면 돌아가면 될 일이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유로 영국에 살기로 작정했으니 이방인의 삶을 견뎌내는 것도 우리의 몫일 테다. 가슴을 치며 견뎌야 했던 지난 2년의 시간도 관문이었을 것이다. 


영원한 이방인? 나는 그거 하기 싫다. 하기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뜬 기름처럼 사는 것은 하지 않으련다. 그러기 위해 나는 영원한 프로젝트를 가동하기로 한다.  이왕 살기로 한 것 영어 실력 더 늘리고 이곳 문화를 익히는 것, 내 이웃에게 나도 좋은 이웃이 되는 것, 타인에게 내가 먼저 다가서는 것, 이 길이 맞았을까 하는 고민을 관두는 것. 뭐, 나열하려니 끝도 없겠다. 시골 마을로 이사를 결정한 것도 이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탈 일이 자주 생기겠지만 그래도 마음 다독이며 노력해볼 것이다. 솔직히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도 이방인 같은 기분이 들지 않을까 싶다. 미국, 영국 합쳐서 외국 살이 8년 차에 쓰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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