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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Apr 09. 2021

우리 엄마도 촌지 줬단 말이에요!

세상 억울했던 내 어린 시절의 순간

87년 사회는 노동자 대투쟁으로 난리가 났을 무렵, 나는 학교 대표로 수영대회에 참가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수영을 뛰어나게 잘하느냐? 그것은 아니었는데 수영을 배워서 할 줄 알았고 대회를 한다기에 참가신청을 했다. 즉, 아무 생각 없이 재미있을 것 같아 한 것이다. 큰 대회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인근의 초등학교 몇십 개가 모여서 하는 지역행사 정도였다.  


나 말고도 학교 대표가 셋 더 있었다. 같은 학년인 준희, 아래 학년인 수연과 은주 이렇게 총 4명이 대회에 나갔다. 시합이 있기 며칠 전, 학교를 마치고 실내화 주머니를 빙빙 돌리며 집으로 가고 있었는데 약국 안에서 은주네 엄마가 나를 불러 세웠다. 은주네 엄마는 우리 아파트 입구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던 약사로 학교에서 치맛바람이 세기로 유명했다. 은주 오빠 준호가 나와 같은 반이라 이미 알고 있던 아줌마였다.


“영글음아, 엄마한테 가서 만 원 달라고 해서 약국으로 갖다 줄래? 수영 담당 선생님이 너무 고마워 가지고 우리가 좀 모아서 드리기로 했거든.”     


여기서 말하는 수영 담당 선생님은 5학년 7반 남자 담임선생님이다. 그는 대회 당일날 우리를 이끌고 대회에 나갈 예정이었다. 나리네 엄마는 눈매가 날카로웠다. 느닷없는 요청에 나는 아무 대꾸도 못하고 그저 알겠노라 대답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 은주네 엄마가 만 원을 받아서 약국으로 갖고 오래.” 

“무슨 소리야? 왜 만 원을?” 

“선생님께 모아서 드린데. 너무 감사해서.”

“그 선생님이 수영을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뭐가 감사해!” 

“몰라, 그냥 그렇게 하래.     


엄마의 말에도 역시 그럴듯한 말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5학년 7반 담임선생님에게 왜 만 원이나 되는 돈을 드려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만 원은 고급 커피 두 잔도 못 마시는 가격이지만 당시의 물가를 고려하면 꽤 큰돈이었다. 떡볶이 1인분이 100원, 버스요금이 70원이었으니 오늘로 따지면 20배 정도는 곱해야 한다. 그러면 20만 원. 아이들을 대회에 데려가는 대가로 80만 원을 받는 선생님이라니. 흔쾌히 내준 것은 아니지만 엄마는 만 원을 내놓았다. 그것을 고이 받아다가 약국에 전달했다.     




대회 당일이 되었다. 이른 아침 시간 약속 장소인 야외 수영장에 모였다. 그런데 나만 빼고 준희, 수연, 은주는 엄마와 함께 왔다. 걔네들 엄마는 큰 가방에 간식까지 잔뜩 싸들고 왔다. 나만 혼자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느낀 감정은 희한하게도 창피함이었다. 이런 대회에는 당연히 부모가 와야 하는데 그걸 모르는 우리 엄마도 부끄러웠다. 엄마에게 와야 한다고 말했으면 우리 엄마가 왔을까? 다른 엄마들은 어떻게 알았지? 너무 당연한 건가. 머릿속이 온통 그것에 사로잡혀 수영을 잘해야 한다는 마음은 진작 사라지고 없었다. 



대회가 시작되었다. 항목별, 학년별로 경기가 펼쳐졌다. 나는 평영에 참가했는데 총 8명이 하는 시합에서 4등을 했다. 수영을 마치자 준희네 엄마가 수건을 들고 있다가 나를 닦아 주었다. 준희가 내 친구가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을까. 34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걔네 엄마가 무척 고맙다. 준희, 수연, 은주 모두 좋은 성적을 거두진 못했다. 4등, 5등 등수가 다 이랬다. 3등 안에 들어야 금은동 메달을 받을 수 있는데 우리 학교는 단 하나의 메달도 따지 못했다. 




심장이 배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사건이 벌어졌다. 어느 월요일 아침 조회 시간, 3000명이 넘는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였다. 학생들은 군대 마냥 열과 행을 맞추어 섰다. 여느 때와 같이 교장 선생님 훈화가 이어졌다. 조회가 끝날 무렵 조회를 이끄는 선생님의 입에서 수영대회 시상식을 하겠다는 말이 들렸다. 수영대회라면 내가 참가한 그것? 


"지금부터 호명하는 학생은 단상 앞으로 나와 주세요. 박준희."


준희의 이름이 불렸다. 확실했다. 우리 넷이 참가한 그 수영대회가 맞았다.  


"김은주."


그 순간, 내 심장은 폭발하는 줄 알았다. 너무 세차게 뛰어 몸 자체가 흔들릴 지경이었다. 전교생 앞에서 상을 받게 되는 순간을 얼마나 꿈꿔왔던가. 주목받고는 싶은데 그럴만한 건수가 없어서 속상했던 순간이 한둘이 아니었다. 수영을 배워놓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등수는 상관이 없었나 보다. 참가만 해도 상을 주다니, 이런 학교에 다니는 게 자랑스러웠다. 


"이수연."


이젠 내 차례가 올 것이다. 우리 반 아이들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놀랄까? 얼마나 부러워할까? 엄마, 아빠, 동생에게 자랑해야지. 이모한테도 전화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음 세 명의 학생은 학교를 대표해서 수영대회에 참가하여 학교의 위상을 높인 바, 이에 상장을 수여합니다."  


어라? 나는? 선생님! 저도 여기 있어요! 심장은 아직도 세차게 뛰고 있는데 끝끝내 내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이번엔 얼굴이 뜨거워졌다. 머릿속에서 일어났던 생각을 옆에 선 친구들에게 들킬 것만 같아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했다. 하지만 누구라도 알아차릴 것 같아 (사실 아무도 관심 없었을 텐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리곤 함께 대회에 참가했던 아이들이 나만 쏙 빼고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그것도 교장 선생님께 상을 받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날 나의 작은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인생의 쓴 맛을 보았다고나 할까. 진실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준희, 수연, 은주네 엄마가 수영 선생님에게 뭔가를 더 했을 거라는 짐작이 갔다. 추가로 더 큰돈을 드렸을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우리 엄마가 준 만 원이 세 엄마가 준 돈으로 둔갑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흔다섯의 나라면 어찌 된 영문인지 가서 따져 물었을 텐데 11살 아이에게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속상한 마음, 김칫국 신나게 마신 부끄러운 마음을 꽁꽁 숨겨놓을 수밖에는 별달리 할 게 없었다. 



   

그 기억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살면서 종종 그때가 떠 오르곤 한다. 이제 억울함은 희석되어 "내가 어릴 적에 이런 일도 있었잖아" 하면서 추억담처럼 펼쳐 놓을 줄 알게 되었다. 궁금하다. 엄마의 든든한 울타리를 가졌던 그녀들은 지금 잘 살고 있을까? 수영 대회에 나가 만 원이나 되는 촌지를 주었지만 상을 받지 못한 나도 잘 살고 있으니 그들도 안녕할 것이다.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지만 혹시라도 만나면 묻고 싶은 게 있다. 너희들끼리 상 받았을 때 내 생각은 좀 했느냐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마음은 들지 않았느냐고.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한들 어쩌겠나. 우린 모두 어린 아이들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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