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집에 들어서면서 하는 말이었다. 어? 정말? 드라마 위력 한번 대단하네. 잠깐, 그 말인즉슨, 초딩들도 그 영화를 봤다는 얘긴가? 영국 애들이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를 발음하기는 좀 어렵지 않나? 여러 생각이 짬뽕이 될 무렵 딸이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우리나라의 그 놀이를 하긴 하되 <오징에 게임>의 영어 자막에 소개된 것처럼 <그린 라이트, 레드 라이트>라 부른다고 했다. 술래가 서있다가 뒤를 돌아보며 레드 라이트!라고 외치면 아이들이 움직이다가 멈추는 것이다. 움직여서 걸리면 다시 원래의 지점으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단다.
엄밀히 따지면 한국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아니란 얘기다. 움직이면 술래와 새끼손가락 걸고 기다려야 하는 조마조마함이 빠지다니! 어쩐지 김 빠진 사이다 같은 놀이가 된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한국 문화가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것도 내가 어릴 때 신나게 하던 놀이 문화가 전 세계 곳곳에서 부활할 줄이야.
런던에 사는 지인이 관련된 이야기를 했다. 그 집 아들이 우리 딸과 나이가 같은데 (만 9살) 어느 날 학교에서 가정통신문을 보냈다고 한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오징어 게임>을 하고 노니 부모의 주의를 요한다고. 지인은 그 공문이 한국 문화가 마치 위험한 놀이처럼 왜곡된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고 했다.
공문까지 보내게 만든 <오징어 게임>
"런던 학교에서 보냈다던 공문 이야기를 글로 써봐야겠어"
저녁을 먹다가 남편에게 말했다.
"그거 신중하게 잘 써야 할 것 같아. 결론은 뭐라고 쓸 건데?"
"결론? 그저 팩트를 보여줄 건데?"
"그래도 그 글을 쓰고자 하는 목적이 있을 거 아니야. 황동혁 감독이 우리나라 옛 문화를 오염시켰다고 쓸 거야? 애들에게 드라마를 보여준 부모 잘못이라고 쓸 거야?"
"아직 주제만 잡고 거기까진 생각을 안 해봤는데. 흠... 감독이야 얼마든 그런 영화 만들 수 있지. 그러고 보니 아이들이 드라마를 안 봤다 해도 로블록스 같은 게임으로 접할 수도 있겠구나."
그날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잔인하고 끔찍하지만 현 세태를 반영하며 어른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 세계를 열광하게 만든 <오징어 게임>, 그 속에서 전파되고 있는 한국 문화, 어느덧 영국 시골마을 아이들에게까지 퍼진 (조금은 모습을 달리 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한 런던의 초등학교에서 날아온 주의 요망 공문.
지인에게 다시 물어보았더니 공문에는 아이들이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게임을 하는 것에 대한 우려와 넷플릭스나 로블록스 같은 플랫폼에 접속할 때 부모의 관심과 지도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했다. 부모들이 자녀가 온라인을 사용할 때 잘 관리해야 하는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닐 텐데, 별도 가정통신문까지 보낸 걸 보면 <오징어 게임>의 영향력이 대단한 것만은 사실이다.
아이들이 자기들만의 버전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예상하건데 게임을 하다가 졌을 때 총에 맞아 죽는시늉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아이들은 나뭇가지로 칼싸움을 하다가도 쓰러지며 죽는 흉내를 하며 논다. 온라인 게임 속 세상은 더 하다. 마인크래프트만 하더라도 그 안에서 귀여운 동물들을 마구 죽이니까. 교장이 어떤 생각으로 공문을 보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죽는 흉내를 내는 걸 봤을 때 영화 속 장면이 오버랩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들은 이야기만 가지고 섣부른 판단은 하지 않으려 한다.
결론을 향하여
며칠 뒤 딸아이가 속해 있는 스카우트 모임에서도 어른들의 지도하에 <레드 라이트, 그린 라이트> 놀이를 했다고 들었다. 활동 사진이 올라온 걸 보니 아이들 모두 즐거워하는 표정이었다. 새끼손가락 거는 심장 쫄깃함이 없어도 아이들은 그저 뛰고 달리다 멈추는 활동을 좋아했다. 그때 깨달았다. 여러 사람이 모였을 때 가능한 놀이, 아이들의 신체를 발달시켜줄 놀이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제격이 아닌가! 이왕 이렇게 부활한 거 제대로 된 한국식 놀이 방법을 알려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뒤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