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와인을 구독해서 마신다. 매달 £30(약 4만 5천 원) 씩 적립을 하다가(금액은 높일 수 있음) 서너 달에 한 번씩 와인을 주문한다. 12병이나 15병이 한꺼번에 오는데 거기에 서비스가 한 병 더 추가된다. 아직까지도 이렇게 많은 와인이 배달되면 내가 마치 진정한 술꾼이 되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술을 사랑하지만 그다지 센 편은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하는 생각이 넘실대곤 하지만 한동안은 어떤 와인을 살지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 편하긴 하다.
주문할 때는 대개 적립금만 가지고는 모자라서 추가 금액을 더 내야 할 때가 많다. 어떤 와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와인을 구독하려면 해당 업체에 멤버십 가입을 해야 하는데 네이키드와인이나 버진와인 등 다양한 곳이 있다.
영국은 와인뿐 아니라 위스키 같은 도수 높은 알코올도 온라인으로 살 수 있는 나라다. 미국에서는 지붕 없는 야외에서 술을 마시면 불법인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살다가 영국에 오니 너무 손쉽게 술을 살 수 있어 놀랐었다. 아마존에 가도 버튼만 몇 번 클릭하면 구매 완료! 지인의 말에 따르면 영국 사람들의 알코올 사랑이 지독해서 심장 관련 병으로 사망하는 수가 높다고 한다.
배달된 와인을 세워두면 왠지 든든! - 우리 부부는 레드와인 덕후
와인을 구독해서 마시면 좋은 점이 있는데 업체 자체에서 와인의 품질을 어느 정도 보장한다는 것이다. 마트에서는 살 수 없는 자기들만이 취급하는 와인을 판다. 가격대가 조금 있는 편이지만 15병씩 한꺼번에 사면 할인 혜택이 있어서 평소에 사서 마시는 와인 가격보다 조금만 더 내면 가능하다. 어쩐지 대량 구매를 하다 보니 그래도 싸게 먹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 잘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착각일 것이다. 술을 아예 안 마시면 경제에도, 가계에도 좋을 건데.
활짝 꽃핀 구독경제의 시대
구독경제의 시대가 열렸다. 옛날부터 우유, 신문 등의 제품을 정기 구독(배달)해서 소비했지만 오늘의 구독경제는 차원이 달라졌다. 여러 서비스를 소유가 아닌 경험의 가치로, 혹은 일정한 상품을 정기적으로 배달받아 미래의 소비를 약속하는 형태다. 와인을 첫 번째 예로 들었지만 우리 가정이 이미 구독하고 있는 것의 가짓수는 많다. 그것을 종류별로 나열해 보면,
(1) 콘텐츠 구독
- 아마존 프라임 / 넷플릭스 / 디즈니 플러스 / 밀리의 서재 / 예스 24 북클럽
(2) 소프트웨어 및 프로그램 구독
- 어도비 / 캔바
(3) 아이템 구독 - 와인 빼고 모두 아마존에서 구독
- 와인 / 쌀 / 쌀국수 / 계란국수 / 다크 초콜릿 / 천연 손세정제 원료 / 사람 치약 / 개 치약 / 개 구충제 / 영국 밀키트 (가끔 이용)
(4) 레터 구독 (무료지만)
- 팀라이트 주간 레터 <글쓰는 마음> / 선량 작가님 주간 레터 <줌마 인 밀란>
늘어놓고 보니 생각보다 많다. 어떤 것은 1년 치를 완납하기도 했고 어떤 것은 달마다 결제를 한다. 아이템 구독의 경우에는 내가 정한 시기별로 결제가 되는 시스템이다. 구독경제가 뭔지, 그것이 대세가 되고 있는지 깨달을 새도 없이 이렇게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요즘은 자동차나 기업 간 서비스 등 전 산업으로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하나은행에서 지난 2월에 발행한 IQ블로그에서는 "소유보다는 합리적인 소비 성향"을 지향하는 30-40대가 구독경제의 주요 소비 주체라고 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구독경제는 과연 합리적인 소비일까? 합리적인 소비라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알뜰하게 하면서도 만족감을 주는 소비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완전히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보다는 매달 이용료를 내고 사용하는 것이 싼 것 같고, 정기적으로 배달을 시키면 하나 살 때보다 저렴하며 따로 신경 쓸 필요가 없어서 편리해 보인다. 하지만 가짓수가 많다 보니 매달 내야 하는 비용이 상당하다. 하나씩 신청할 때는 별 게 아니었는데 모아 보니 기대치를 넘어서는 것이다.
아이템 구독의 경우 또 다른 문제가 있는데 한번 구독 설정을 해 놓으면 그 제품의 가격이 올라가든 말든 배달 날짜가 되면 바로 배달이 된다는 점이다. 특히 쌀의 경우가 그랬다. 한 번은 구독을 해지하는 것을 깜빡하는 바람에 여유분이 많 이 쌓여 있는 반려견용 치약이 배달된 적이 있었다. 남편이나 나나 정신없이 바빴던 탓에 배달된 치약을 보고도 해지를 놓쳐서 3개월 뒤에 또 오는 대형 참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참고로 개 치약, 한 번에 3개씩 온다. 우리 집 서랍에는 10개가 넘는 치약 님들이 누워 계신다. 개는 이를 잘 안 닦인다. 대신 개껌으로. 그럼 치약의 운명은?
소비자가 더 똑똑해져야
기본적으로는 구독경제라는 것이 소비자보다는 그것을 제공하는 기업들에게 더 이익을 주는 모델이라 생각한다. 소비자가 구독을 하겠다는 것은 미래의 소비를 미리 약속하는 행위이다. 이 얼마나 달콤한 약속인가. 기업 입장에서는 안정적인 매출의 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 대부분 선불로 결제를 하기 때문에 자금을 운용하기도 좋을 것이다. 물론 기업은 이탈 고객을 막기 위해서 제공하는 서비스를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구독경제가 아니라 해도 모든 기업이 해야 할 일이다.
KT 경제연구소는 2020년 구독경제 시장 규모를 40조 원이라 분석했고 2025년에는 100조 원에까지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우리가 싫건 좋건 기업이 이 시스템을 받아들여 발전시킬 가능성이 크다.
결국 소비자가 똑똑해져야 한다. 합리적인 소비를 해서 물품이나 서비스를 구독하는 것이 아니라 구독경제를 하니까 합리적인 소비를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끊고 싶은 구독 서비스는 미리미리 챙겨야 한다. 요즘은 한 달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하다가 이후 자동으로 유료 전환되는 경우가 많아서 자칫 잘못하다가는 해지 순간을 넘겨 요금이 결제될 수도 있다. 업체에 이야기하면 사용 일자를 빼고 어느 정도 환불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시간과 품이 드는 일이므로 미리 신경 쓰는 게 좋겠다.
경험에 따르면 구독하기는 매우 쉬운데 해지하기는 어려운 편이다. 뭘 자~~꾸 묻는다. 정말 탈퇴할 거야? 이런 혜택을 준다면 마음 바꿀래? 진심이야? 진짜지? 몇 차례 이런 질문에 답을 해야 서비스를 끊을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더 웃긴 건 그렇게 어렵게 해지를 하고 시간이 흐른 뒤 다시 가입하면 1개월 무료 서비스가 다시 생기는 상품도 많다는 점이다. 이래저래 신경 쓸 건 더 많아지고 똑똑한 소비를 하기도 벅찰 지경이다.
그래서 고민인데, 와인 구독을 끊어 말어? 혹시 끊는다고 하면 할인쿠폰 몇 장 챙겨 주려나? 나는 나쁜 소비자인가 똑똑한 소비자인가? 이참에 술을 끊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