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진 아이패드가 잘못했네
아이패드로 드라마를 보다가 갑자기 꺼졌다. 까맣게 변한 화면 위로 내 얼굴이 반사되어 나타난 것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심장이 쿵, 동공이 확장! 저게 나야? 그 안에는 심각하게 인상을 구긴 채 입을 앙 다문 나이 든 여자가 있었다. 머리칼은 사자처럼 제 멋대로 헝클어져 가꾸지 않은 티가 팍팍 났고 뭐랄까 되게 못생겨 보였다. 외모의 문제가 아니었다. 표정이 참 보기 싫은 거였다. 재미있는 드라마였는데 왜 그런 표정으로 보고 있었을까. 링컨이 그랬단다.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얼굴은 한 사람이 살아온 삶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윽, 망했다.
젊은 날의 나는 잘 웃는 사람이었다. 긍정의 화신이었으며 사막 한가운데 떨어뜨려놔도 잘 살아나갈 사람이란 소리를 듣곤 했다. 가끔 엉뚱하고 특이하지만 발랄하기 짝이 없는,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인상 쓸 일도 많지 않았지만 그랬다 해도 몇 초만에 활짝 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마흔의 나는 부정의 화신이 되었다. 인생이 꼭 뜻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는다는 걸 알아버린 탓인지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 걱정부터 앞선다.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하며 내 삶을 남루하게 만든다. 내가 원하는 방식 데로 자라지 않는 아이들은 스트레스다. 아이들의 생각과 특성을 존중하겠다는 멋진 다짐은 돌잔치 때나 가능했었나 보다.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 앞에 서면 잘 웃는 편인데, 사람들 없는 아이패드 속의 나는 아니었다. 가식이 벗겨진 진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 한구석이 시렸다.
한숨이 나온다. 꾸미지 않아도 싱그러웠던 젊은 시절이 그립다. 호탕한 웃음소리가 트레이드마크였던 때가 그립다. 내가 40년이나 살았다는 사실은 매번 어색하기만 하다. 흰머리와 주름 이것들은 어디서 온 것인가. 세상 온갖 짜증은 혼자 다 내고 있는 것 같은 저 인상은 정녕 내 얼굴에서 나왔단 말이더냐? 마음은 아직 그대로란 말, 그건 모호한 관용어구가 아니었다. 진짜 내 마음은 늘 20대인데...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왠지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공유나 송중기, 윤현민(요즘 <터널>에서 완전 짱) 같은 남자들은 보기만 해도 늘 설레는데!
마음만 그대로인 건 문제다. 몸 상태는 절정을 지나 하향세로 접어든 지 오래고, 어쩌다 마주친 표정은 이렇게까지 현실주의적인데 마음만 청춘이라면 어쩌자는 건지 원. 그건 언밸런스다. 균형이 깨진 거다. 뭐든 한쪽으로 기우는 것은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주문을 외워야 한다. 마흔을 받아들여야 한다. 마음도 그대로 두지 말고 현실과 마주하도록 해야 한다. 멋짐이 뚝뚝 묻어나는 배우들은 다른 여자의 연인이 될 것임을 인정하자.
이제 마흔의 얼굴을 책임져야지. 나이 들어 변한 외모는 어쩔 수 없다는 걸 감안하고 그것 대신 표정을 환하게 만들어 봐야겠다. 눈꼬리는 곡선으로 내리고 입은 양 끝이 올라가도록. 사람 좋은 아줌마가 될 테다. 자주 웃어야겠다. 남들과 비교하지 말아야겠다. 이만큼이라도 살 수 있다는 걸 감사해야겠다. 남편과 아이들을 더 넉넉한 가슴으로 사랑해야겠다. 할 수 있는데까지, 할 수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겠다.
그리고 아이패드가 꺼지지 않게 조심해야겠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