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글음 Jun 17. 2017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고?
음악도 변하던데 뭘...

오랜만에 <봄날은 간다> OST 음반을 듣다

다들 그런 노래 하나씩 있지 않나. 들을 때마다 과거 어떤 시절이나 장소가 떠오르는 노래 같은 거. 삶의 특정한 시기에 숱하게 들은 탓에 그때의 기억과 음악이 혼연일체가 되면 그렇게 된다.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대사로 유명한 영화 <봄날은 간다>의 OST 음반이 그랬다. 첫 멜로디가 나오면 나는 언제나 한 곳으로 달려가곤 했다. 부드럽게 휘어진 해안이 있고 잔잔했지만 파도가 끊이지 않았으며, 소설 <무진기행>의 표현처럼 ‘해풍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가 느껴지는 곳, 거제도 겨울바다였다. 20대 한가운데에서 첫 직장을 때려치우고 뭐 해 먹고살아야 하나 고민하며 갔던 곳이었다.       


2002년 2월 거제도


나와 비슷한 시기에 백수가 된 선배와 거제도 해안 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수도 없이 <봄날은 간다>를 들었다. 겨울이었는데, 봄은 아직 오지 않았을 때인데, 봄날이 간다면서 아쉬워하며 들었다. 대단한 각오를 하겠다고 간 여행은 아니었지만 뭐라도 해야 했던 우리는 인적이 드문 횟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아픈 척을 하고 후회하며 위로했던 기억이 있다. 파도처럼 살겠다고, 나만의 빛을 내겠다고 어설픈 다짐을 했던 것도 같다. 지금 돌이켜 보면 살짝 민망하기도 하지만 순수했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추억이다. 내 20대의 조각 하나가 OST 음반에 담겨 있어서 좋았다.        


2002년 2월 거제도


아이들용으로 샀던 CD 플레이어를 바라보다가 그때의 기억을 소환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밀려왔다. 아이들이 커가고 영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면서 몇 년 간 듣지 못했다. 어떤 음악도 일부러 들을 시간적,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다. 옛날처럼 <봄날은 간다>의 선율이 흐르기 시작하면 내 젊은 날이 방안 구석구석 퍼질 것이다. 미국에서 유학생 와이프가 되어 집을 청소할 때마다 수없이 들으며 거제도 겨울바다에 갔었으니까 지금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음반들 사이에 끼어 있는 <봄날을 간다>를 찾아 케이스를 열었다. 동그란 CD를 손으로 톡, 빼내었다. 플레이어에 넣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이제 준비되었다. 반갑다 내 청춘이여, 너는 거기서 아직도 헤매고 있니? 1번 곡이 끝났다. 어라. 2번 곡이 시작되었다. "언제였나 그리워 헤매던 나날들 / 분명 난 울었던가 세월에 사라져 간 얘기들 / 나 참 먼 길을 아득하게 헤맨 듯 해 / 얼마나 멀리 간 걸까 그 해 봄에" 3번 트랙이 시작되었다. 이상했다. 4번이 끝났다. 이거 왜 이러지. 어디로 갔지?

 

거제도가 사라졌다...... 


이럴 수가. 겨울바다도 사라졌다. 더 이상 방황했던 젊은 날의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 아련하지 않았다. 미국 타운하우스에서 청소기를 돌리며 들었던 풍경마저 희미해졌다. 음악과 어우러졌던 그 시절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되살아나지 않았다. 아, 음악도 빛을 바라는구나. 그것과 굳게 엉켜 있다고 믿었던 추억도 느슨해지는 거였구나. 그런 거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음악과 추억 사이에 틈이 생겼나 보다. 새로 난 풀뿌리가 잔 가지를 뻗어 둘 사이를 갈라놓기라도 한 모양이다. 마음에 구멍이 난 것 같았다. 나는 타임머신을 잃었다.  


음반 속 상우(유지태)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잘 할 께. 너 나 사랑하니?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나도 묻고 싶었다. 어떻게 음악이 변하니. 묻고 나니 피식 웃음이 났다. 사랑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는데 음악인들 변하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그걸 가슴에 품고 있는 건 결국 인간인데 어떻게 변하지 않겠니. 자문자답, 우문우답. 상실감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려 노력했다. 


웃다 눈물이 한 방울 맺혔다. 음악이 변해서는 아니다. 예전엔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가사 내용이 가슴에 콕콕 박혔기 때문이다.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꽃잎은 지네 바람에 /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사람들 / 가만히 눈감으면 잡힐 것 같은 / 아련히 마음 아픈 추억 같은 것들" 내 봄날도 가는 것 같았다. 한국을 떠나올 때만 해도 아직 인생의 하이라이트가 한 번쯤은 더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확신이 들지 않는다. 생각하는 데로 살지 않으면 사는 데로 생각한다는 유명한 명언이 있다. 나는 사는 데로 생각한 지 오래다. 생각데로 살며 변하고 싶은데 길이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20대의 그때보다 더 헤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음악을 틀어 놓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먹다 남은 된장찌개를 한 숟갈 뜨려는데 국물 한 방울이 그릇 벽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어머머, 하며 아줌마 특유의 재빠른 동작으로 된장 콩 쪼가리와 국물을 걷어냈다. 한창 감정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로 있었는데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그 괴리가 지랄 맞아 또 한 번 허탈한 웃음이 났다. 음악에서 빠져나온 20대는 흘러 보내기로 했다. 이제 새로운 기억을 새겨야 할 텐데 그 속에 된장 콩은 빠졌으면....... 이제 6월, 봄날은 갔고 여름이 오는데 한동안 <봄날은 간다>를 듣게 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흔, 얼굴에 책임질 나이라는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