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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Dec 08. 2017

카스텔라 기계의 추억

엄마의 팔은 수리수리 요술 봉

그래도 사람 사는 인심이 지금보다는 후했던 어린 시절, 영등포구 대림동 우리 동네에는 갖가지 물건을 들고 팔러 다니는 아주머니들이 많았다. 여느 집에서는 누구누구 엄마로 불렸을지도 모르는 그녀들이 집집을 돌며 벨을 누르면 우리 엄마처럼 낮에 혼자 남은 주부들은 스스럼없이 그네들을 집안으로 들였다. 대개 화장품이나 부엌 살림살이 같이 가정주부들이 혹할만한 것들이 쏟아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간혹 단골이 되면 판매원들이 방문하며 들은 남의 집 속사정까지 풀어놓는 통에 한바탕 수다의 장이 열리기도 했다.    


어쩔 땐 여러 주부가 한 집에 모여 제품 설명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어느 설명회를 다녀온 우리 엄마 손에 시루떡을 찌는 것 같은 둥글넓적한 기계가 들려 있었다. 6살 나와 4살 동생 눈에 비친 그것은 엄마가 가끔 사는 화장품만은 못한 물건이었다. 로션이나 크림이라면 뚜껑을 열어 향긋한 냄새를 맡아보거나 몰래 손가락으로 찍어 얼굴에 문질러 볼 수도 있는데 그건 갖고 놀기에는 너무 크고 무거웠으니 말이다. 까만 전기 줄이 연결되어 있어 엄마는 잘못 만지면 ‘크~은 일’ 난다고 겁을 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가지고 놀다가 궁둥이를 얻어맞는 것으로 끝을 맺는 화장품과는 비교도 안 되게 황홀한 물건이었다. 엄마는 그 기계로 천상의 맛을 만들어냈으니까. 그건 바로 카스텔라였다. 간식이라고 해봤자 삼시 세끼 말고는 강냉이나 튀밥 같은 게 전부였던 때 엄마가 카키색 찜기를 꺼내는 날은 우리들의 잔칫날이었다. 식탁에 밀가루며 계란, 각종 도구들이 나오면 우리 마음은 벌써 카스텔라 맛을 상상하느라 하늘 높이 훨훨 날아올랐다.  카스텔라를 만들 때마다 엄마는 설명회에서 판매원이 시범 보인 것을 다시 떠올리려는 듯 두 눈을 천장으로 향했다, 벽 쪽으로 향했다 하며 입속으로 중얼중얼 되뇌었다. 들어갈 재료와 만드는 순서를 생각해 내는 것이었다. 그것이 하나씩 입 밖으로 튀어나올 때마다 엄마의 고개는 아래로 내려왔다 위로 다시 올라가곤 했다. 그것은 엄마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제일 먼저 할 일은 계란 노른자와 흰자를 따로 분리하는 것이었다. 엄마가 계란을 조심스레 깨뜨려 노른자를 이쪽 껍질에서 저쪽 껍질로 왔다 갔다 하면 신기하게도 흰자가 ‘미끄덩’하며 아래 받쳐 놓은 그릇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우리는 ‘와아~’하는 환호성을 지르며 손뼉을 쳤을 것이다. 노른자와 흰자가 각각의 그릇에 모이고 나면 설탕을 붓고 힘차게 저어야 했다. 엄마는 언제나 우리에게 이 작업을 해보라고 했다. 신이 난 동생과 내가 각각 노른자, 흰자를 하나씩 골라잡고 거품기로 젓다 보면 금세 팔이 빠질 만큼 아프기 시작했다. 요즘이야 전기 거품기가 흔해 몇 초 만에 쉽게 끝낼 수 있지만 그때는 그런 게 없을 시절이었다. 하나마나한 우리들의 젓기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엄마가 저을 차례.      


엄마의 팔은 수리수리 요술 봉이었다. 우리가 하다 만 그릇을 다시 가져와 사이에 끼고 “의야~!”라는 기합까지 넣어 빠른 속도로 젓다 보면 콧물 같이 미끈한 흰자가 어느새 하얗고 고운 거품이 되어 부풀어 올랐다. 거품기로 오른쪽을 들어 올리면 오른쪽에 산이 생기고 왼쪽을 들어 올리면 왼쪽에 산이 생겼다. 산꼭대기를 살짝 찍어 입안에 쏙 넣으면 설탕 때문에 맛이 달콤했다. 노른자는 세차게 저어봤자 흰자 같은 푸짐한 거품 산을 만들어 내지 않았지만 뽀글뽀글 작은 거품들이 생기는 것도 아주 신기했다.       


흰자 저은 것과 노른자 저은 것을 한데 합치고 나면 밀가루를 넣어야 했다. 사이사이에 공기가 들어가도록 고운체로 걸러서 넣어야 했다. 그런데 이게 또 재미가 여간 좋은 게 아니었다. 위에서 부은 밀가루 양이 아무리 많아도 엄마가 체 옆구리를 몇 번 툭툭 쳐서 좌로 우로 흔들라치면 금방 고운 가루가 되어 아래로, 아래로 내려앉았다. 소복소복 눈이 내리는 것 같았다. 우리는 엄마가 밀가루를 칠 때 몰래 체 아래로 손을 쭉 뻗었다가 빼곤 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야단을 맞아도 손등 위로 떨어진 밀가루 눈은 촉감이 어찌나 곱던지 다른 손으로 손등을 문질러 온통 하얗게 만들어 놓고는 까르르까르르 웃기 바빴다. 웃는 바람에 밀가루가 방바닥에 휘날리는 날이면 더 큰 호통이 날아왔지만 그까짓 것 조금 있다가 먹을 카스텔라를 생각하면 다 참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난리 법석을 떨며 밀가루까지 섞고 나면 반죽이 완성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계란, 밀가루, 설탕 외에 몇 가지 재료가 더 들어갔을 텐데 추억 속 카스텔라 조리법에서는 그게 다다.  


엄마는 방문 판매로 산 기계 안에 신문지를 깔았다. 그 위에 반죽을 가만가만 들이부었다. 노란 반죽은 이내 평형을 맞추고 잠잠해졌다. 선반을 열어 커피가 담긴 병을 꺼냈다. 미리 남겨 놓은 계란 노른자에 커피 몇 알을 떨어뜨려 섞었다. 노른자는 황토색이 되었다가 갈색, 고동색이 되었다. 깨끗한 비닐 한 귀퉁이에 그걸 담았다. 그리고 아주 조금, 아주 조금만 모서리를 가위로 잘라냈다. 재빨리 반죽이 있는 곳으로 가져가 일자로 세우고는 몇 바퀴 돌렸다. 그러고 나면 진한 커피 노른자가 가늘게 선으로 떨어져 골뱅이 모양의 무늬를 만들어 냈다. 진짜 마지막 순간에 필요한 건 젓가락. 그것으로 동그란 반죽 한가운데서부터 가장자리로 밀어 올리는 일을 빙 둘러가며 여덟 번 정도 하면 골뱅이가 거미줄 같은 무늬로 변신을 했다. 뚜껑을 덮고 스위치를 올리면 80년대 식 카스텔라 만들기의 여정이 끝이 났다. 엄마는 카스텔라가 익을 동안 부엌 가득 어질러진 재료를 정리하고 설거지하느라 항상 바빴다. 하지만 벌써 우리들의 뱃속은 말이 아니었다. 언제나 빵이 익어가는 향긋한 냄새가 집안 가득 퍼지면 온 몸의 감각기관이 오직 하나에만 집중되기 때문이었다. 

     

“엄마, 빵 다 됐어?”

“조금만 더 있으면 돼.”

“엄마, 지금 열어 볼까? 다 익은 것 같은데.”

“그러면 익다가 말아. 꾹 참고 기다려야 맛있는 빵을 먹을 수 있지.”

“엄마, 이 거 다 먹으면 언제 또 해 줄 거야? 엄마, 엄마, 엄마……”     


우리가 번갈아 가며 질문을 퍼붓다 보면 스위치 불이 꺼지고 카스텔라가 완성되었다. 셋이 동그랗게 둘러앉아 기계의 뚜껑을 열었다. 먼저 뜨거운 김이 ‘쏴아’ 빠지면 그 아래로 둥그런 빵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엄마가 장갑을 끼고 빵을 기계에서 들어 올렸다. 익는 동안 빵과 하나가 되어 붙어 버린 신문지까지 딸려 올라왔다. 엄마가 “어디 얼마나 잘 익었나 보자”하며 양쪽을 잡고 반절을 뚝 가를 때까지 우리는 숨죽이고 지켜보곤 했다. 드디어 카스텔라 특유의 부드러운 속살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어쩔 땐 떡 같이 한데 뭉치기도 하고 어쩔 땐 손톱 반절만 한 크기로 하얀 밀가루가 그대로 나오기도 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엄마가 부채꼴 모양으로 잘라 접시에 한쪽씩 담아주면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것을 동생과 나는 후후 불어가며 입속에 넣었다. 크기가 커서 이삼일은 족히 먹을 수 있는 대보름 카스텔라. 우리 자매는 그것을 먹으며 성장기를 보냈다.     



이젠 내 차례다. 나도 우리 엄마처럼 딸이 둘이다. 빵은 제과점이나 마트에서 얼마든지 사 먹을 수 있는데도 딸들은 꼭 주말이 되면 컵케이크를 굽자, 카스텔라를 만들자, 찐빵을 해보자 난리다. 첫째 딸은 이젠 제법 커서 각종 재료들을 계량하거나 달걀을 깨서 흰자, 노른자 따로 분리하는 것을 할 수 있다. 둘째는 섞는 것 도사다. 물론 나는 전기 거품기로 거품을 낸다. 거품기는 사용할 때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빠르게 돌아간다. 사실, 좋은 게 아니어서 그런지 잡고만 있어도 팔이 아플 때가 있다. 그때마다 엄마의 요술 팔이 떠오른다. 수리수리 요술 봉 우리 엄마 팔. 이제 이른을 바라보는 우리 엄마.        


그러고 보니 엄마가 한창 카스텔라를 만들던 나이가 30대 초반에서 중반이었으니까 지금의 나보다 예닐곱 살은 젊은 나이였다. 그땐 먹는 입장이라 무작정 즐겁기만 했는데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보니 딸 둘 데리고 빵 만드는 일이 쉬웠을까 싶다. 건설 회사에 다녔던 아버지는 사우디아라비아다, 리비아다 해서 중동으로 장기 출장을 가고 집에 없었으니 젊은 엄마는 남편을 향한 그리움까지 빵 반죽에 넣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몇 주 뒤 엄마를 보러 한국에 가기로 했다. 이번에 가서 아이들 앉혀 두고 "엄마가 어릴 때 할머니가 빵을 해주셨는데 말이야" 하면서 빛바랜 추억담을 펼쳐 놓으면 엄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방긋 카스텔라 웃음을 지으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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