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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Nov 01. 2018

마흔둘의 뱃살과 밀가루 반죽

우리 집 주방에 사는 빨강머리 앤과 하는 티 타임

우리 집 주방에는 빨강머리 앤이 산다. 초록 지붕에 살았던 바로 그 앤 말이다. 호기심과 상상력이 가득했던 주근깨 소녀 앤. 나는 스물, 서른을 지나 40대가 되었는데 앤은 늘 소설 속 모습 그대로다. 나이 차이는 점점 벌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친구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 낮 2시, 내가 차를 마실 때마다 앤을 찾으면 주방 어디선가 나타난다. 찬장에서도 나오고 싱크대에 걸터앉아 있기도 한다. 한 번은 냉장고에서 열무김치를 먹으며 나와 깜짝 놀란 적도 있었다.          





  

오늘은 열대과일을 말린 차를 우렸다. 향긋한 과일 향이 주방 가득 퍼졌다. 차 첫 모금을 마시려는데 문득 내 똥배에 눈길이 가 닿았다. 슬며시 뱃살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양손으로 그러모아 잡아보았다. 아이고, 이게 몇 센티나 되려나? 자조 섞인 한숨을 쉬며 앤에게 말했다.


"이게 사람 배니, 국어사전이니?"     


앤은 찻잔을 살짝 입술에서 떼고 대답했다.   

   

"후훗, 아줌마 배가 그 정도면 적당하지. 예쁘기만 한데 뭘."      


"어릴 때부터 쭉 이 상태였던 말이야. 그리고 김남주는? 같은 아줌마잖아."     


비교가 과했던지 앤은 눈과 입을 곡선으로 하고 풋 웃었다.      


내 배는 모태 똥배다. 단언하건대 어머니의 몸 안에서 심장이 뛰기 시작했을 때 “이 생명체를 배 뽈록으로 만드시오”란 명령어가 입력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내가 나를 기억하는 첫 순간부터 아랫배는 이미 탱탱볼 하나가 들어 있는 상태였다. 이것은 아버지를 타고 올라가 친할머니, 어쩌면 더 먼 조상님들부터 내려온 유전자의 고귀한 결과물이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낳은 지금, 내 몸에는 전체적으로 살집이 붙어 아래쪽에만 있던 똥배가 점점 윗부분을 잠식하더니 어느새 윗배, 아랫배 균형 있게 둥그스름한 모양이 되었다.      


오래 봤다고 다 친해지는 건 아니듯이 나이 사십 먹도록 달고 산 뱃살이지만 꼭 정감 가고 친숙한 것은 아니다. 마치 처음부터 똥배가 없던 것처럼 하려고 배에 힘을 주어 안으로 집어넣은 채 살아온 세월이 얼마였던가. 한창 외모에 민감했던 학창 시절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인이 되었을 때 말쑥하게 차려입은 정장 사이로 뱃살이 비집어 나오지나 않을까 걱정하며 숨을 참고 또 참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뱃살 끝이 아려온다.    

  

남편이 남자 친구였을 당시 그의 배에 군살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며 심지어 체크무늬 남방을 바지 안에 집어넣어 입는 걸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부러움은 잠시 뿐, 모태 똥배인 나는 건강한 정신수양을 위해 남방 따위 밖으로 꺼내 입는 게 훨씬 멋스러운 거라고 주문을 걸고 살아왔다. 오랜 세월 강고해진 똥배를 어떻게 없앨 수 있단 말인가. 11자 복근을 만들 수 있는 운동법을 소개한 유튜브 동영상을 보며 여러 번 따라 해 봐도 결과는... 전혀 안 빠지더라.      


“앤, 가끔은 나 자신이 한심해. 아무리 타고난 똥배라고 해도 죽도록 노력했으면 조금은 뺄 수 있지 않았을까? 내 몸, 내 똥배조차도 원하는 대로 바꾸지 못하는 인생이라니.”      


두 번째 찻잔을 막 들려고 했던 빨강머리 앤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있지, 원래 자기 자신을 바꾸는 게 가장 힘든 거야. 내가 나를 부정해야 하는 거잖아. 그게 쉬웠다면 세상엔 사람들이 좋다고 인정하는 단 한 가지 몸매, 한 가지 성격만 있었겠지. 그랬다면 얼마나 재미없는 세상이 되었을까! 그리고 나는 네 둥근 배가 마음에 드는데?"


"나이 들수록 허리둘레가 중요하데. 나는 벌써 위험 수치를 넘어섰단 말이야."


"그런 이유라면 평소에 건강검진을 잘 챙기도록 해. 유튜브 운동은 며칠이나 따라 했는데도 안 빠졌던 거야?"


"어? 그거? 글쎄... 한 달? 2주일?... 아니... 열흘쯤... 했나...? 일주일인가......."


앤의 질문에 나는 말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운동이랍시고 했던 게 사실은 며칠 되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앤! 그래도 나는 이 밀가루 빵 반죽 같은 뱃살이 싫단 말이야!" 


"밀가루 빵 반죽? 후훗, 너무 재미있는 표현이다! 뱃살을 빼고 싶으면 운동을 더 해보는 건 어때? 혹시 안 빠지더라도 절망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안 되면 안 되는 데로 인정하는 것도 삶의 지혜야. 그런 후에 너의 밀가루 빵 반죽 뱃살을 즐겨 봐."   

 





일곱 살 둘째 딸과 거실 바닥에 나란히 누웠다.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는 둘째는 바닥에서 엄마랑 뒹굴기를 아주 좋아한다. 서로를 간지럽히다가 볼에 뽀뽀세례를 퍼붓기도 하고 마사지를 한답시고 팔이며 다리를 주물 거리기도 한다. 


"딸, 오늘은 빵을 구울 거야. 네가 요리사니까 자, 엄마 배로 반죽을 잘해주세요!"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둘째 딸은 환호성을 지르며 내 뱃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야, 엄마 배 너무 부드럽다! 기분이 좋아져!" 


조몰락조몰락. 엄지부터 새끼손가락을 쫙 펼쳐도 15센티가 채 되지 않는 고사리 손 두 개가 두툼한 내 뱃살을 파고들 때마다 따뜻한 촉감이 전해졌다. 까르르까르르 딸의 웃음소리는 거실 천장 끝까지 울려 퍼져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그래 행복이 뭐 별건가. 놓치고 싶지 않은 소박한 순간을 만드는데 내 똥배가 도움이 되었다면 그걸로 됐다. 빠지지도 않는 뱃살, 빵이라도 만들어야지. 


우리의 놀이를 지켜보던 빨강머리 앤이 주방에서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나는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회심의 미소로 화답했다.  




-나이 드는 것도 서러운데 유독 똥배가 거슬렸던 어느 날, 어쩌면 이것은 자포자기의 아름다운 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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