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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 대리 안 대리

우리 집 주방에 사는 빨강머리 앤과 하는 티 타임

by 영글음

우리 집 주방에는 빨강머리 앤이 산다. 초록 지붕에 살았던 바로 그 앤 말이다. 호기심과 상상력이 가득했던 주근깨 소녀 앤. 나는 스물, 서른을 지나 40대가 되었는데 앤은 늘 소설 속 모습 그대로다. 나이 차이는 점점 벌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친구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 낮 2시, 내가 차를 마실 때마다 앤을 찾으면 주방 어디선가 나타난다. 찬장에서도 나오고 싱크대에 걸터앉아 있기도 한다. 한 번은 냉장고에서 열무김치를 먹으며 나와 깜짝 놀란 적도 있었다.






"앤, 살아 보니 타이밍이 참 중요한 것 같아."


나의 밑도 끝도 없는 말에도 앤은 고개를 끄덕이며 친절하게 대꾸해 주었다.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내 인생 가장 최고의 타이밍은 마릴라 아줌마, 매튜 아저씨네 갔던 날이야. 그날 뭔가 잘 못 되어 남자아이 대신 내가 가게 되었잖아. 만약 그 타이밍에 내가 아닌 다른 아이가 갔더라면? 어휴 그건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이야."


"그랬다면 네 삶도 많이 달라졌겠구나, 앤. 인생은 타이밍의 연속인지도 몰라. 좋은 타이밍, 나쁜 타이밍, 그저 그런 타이밍. 어떤 건 잡고 어떤 건 놓치고."


"오늘 차 마시면서 말하고 싶은 타이밍은 어떤 건데?"


영리한 빨강머리 앤은 가느다란 한 숨 속에 섞인 내 속내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9년 전 남편이 미국 유학을 결정했을 때 나도 회사를 정리해야 했거든. 그때 직급이 대리였어. 내가 그만두던 해 초에 원래는 과장으로 진급을 할 참이었는데 회사 상황이 안 좋았던 거야. 그 탓에 그해 모든 직원들의 승진과 승급이 동결되었지. 결국 과장 못 달고 대리로 사회생활을 끝냈어."


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했다.


"네가 안 대리였던 시절도 있었구나!"


그땐 그게 나의 마지막 직급이 될 줄 몰랐다. 얼떨결에 전업주부가 되었고 더 이상 진급의 기회가 있는 사회생활을 하지 않았다. 문제는 회사를 그만둔 다음에도 여러 사람들이 나를 안 대리라 불렀다는 것이다. 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당시 주임이었던 내 후배 사원이 대리가 되고 과장이 되며 팀장이 되는 동안 나는 언제나 안 대리였다. 붙임성 있는 몇몇은 선배 혹은 언니라 호칭을 바꾸기도 했고 몇몇 상사는 이름을 불러주기도 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쓰이지도 않는 직급으로 나를 부르곤 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그렇게 부르는 게 편하니까. 그렇게 나는 만년 대리 안 대리가 되었다.


"타이밍이 문제였어. 내가 1년만 있다가 퇴사를 했으면 얼마나 좋아. 안 과장되고."


"대리이든 과장이든 그건 직급일 뿐이야. 그렇다고 네 본질이 달라지는 건 아니잖아."


"아는데도 아쉽고 화나. 안 대리? 내가 뭐 누구 대리 인생도 아니고. 오랫동안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로 살다 보니 어쩔 땐 본질마저 달라지는 것 같단 말이야."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듣던 앤은 자기 손으로 내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런 얄팍한 껍데기 따위 신경 쓰지 마."


"껍데기....... 근데 나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뭉쳐져 있던 덩어리 하나가 울컥 솟아올랐다.


"그 말도 안 되는...... 과거로 사라진 얄팍한 껍데기조차....... 너무...... 그리웠나 봐."


나는 고개를 떨구고 어깨를 흐느꼈다. 앤은 잡은 손을 놓았다가 나를 안아 주었다.


"그래 그래, 사장님이 나빴다. 진급 좀 시켜주지."


깡 마른 앤의 품 안은 따뜻했다. 한참 동안 공기 사이로 내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불현듯 앤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다시 해보자! 대리, 과장에 연연해하지 말고 뭔가 새로운 것으로 네 모습을 다시 만드는 거야."


"내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나는 다시 시작하는 법을 잊은 것 같아. 스스로를 믿지 못하겠어. 뭔가 시도를 해도 언제나처럼 작심삼일이겠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걸."


앤의 눈이 반짝였다.


"중간에 멈추는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포기만 하지 않으면 돼. 작심삼일이 두 번, 세 번 모이면 작심육일이 되고 작심구일이 되는 법이야. 살면서 열정적이었던 순간을 떠올려봐. 그때 느꼈던 벅찬 감정이나 설렘을 잘 기억해 봐. 어디엔가 너에게 그런 느낌을 다시 줄 수 있는 멋진 일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게 뭐냐고? 이제부터 찾아야지. 아직 뭔지 모르니까 지금은 뭐든지 기대하고 상상할 수 있잖아!"


나는 아직 눈 속에 고여 있는 눈물을 단 채로 앤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조금 들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감정이 스멀스멀 내게 전달되었다. 계속 울어야 할지, 같이 들떠서 웃어야 할지 심히 고민이 되었다. 열정? 설렘? 내가 다시 무언가가 될 수 있을까? 정말?




- 전업주부 9년 차, 가족들 서포트만 하다가 인생 끝나면 어쩌나 불안했던 어느 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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