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이라는 기준은 모두가 다르지만 내 생각에 이 정도면 종이접기로 '잘' 벌고 있는 것 같다. 월 천만 원의 수입은 아니지만만 예전 직장 다닐 때만큼은 벌기도 하고 때론 남편보다 나을 때도 있으니 더 욕심을 내고 싶지는 않다. 무엇보다 마흔 넘어 경력단절 10년 만에 찾은 새로운 밥벌이가 생기지 않았나! 그 자체로도 충분히 뿌듯하다.
나의 직업은 종이접기 수공예 작가. 무지 거창해 보인다. 실은 내가 직접 붙인 이름이라 더 멋지게 지었다. 직접 지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한국에서는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을 못 보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있기도 할 텐데, 내 시야가 좁은 탓에 못 봤을 수도 있다.
영국 스코틀랜드에 사는 나는 종이접기를 한 뒤 3D 액자에 담아 혹은 카드로 만들어 글로벌 핸드메이드 사이트에 팔고 있다. 미국에서 들어오는 주문이 전체의 90%지만 오늘은 멕시코에도 보냈고, 저번에는 핀란드에도 보냈다. 지난 3년 3개월 동안 약 25개국 사람들에게 1,000여 점 정도의 작품을 팔았다.
엄밀히 따지만 프리랜서이기도 하고, 소상공인이자, 자영업자이며, 온라인 가게 사장일 수도 있고, 그냥 종이 접는 엄마라고도 볼 수 있다. 쪼금 격을 높여 보면 아티스트? 물론 나는 스스로를 아티스트 급이라 여기며 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힘쓰고 있다.
접는 종류는 다양하다. 여우, 강아지, 고양이, 라마 같은 동물도 접고 한복이나 딱지 같이 한국적인 것도 접는다. 그중 매출의 1등 공신은 결혼식 복장 접기다. 고객들이 웨딩 사진을 보내오면 그걸 보고 비슷하게 만들어서 액자에 담는다. 액자는 결혼이나 기념일 선물이 된다.
사실 '종이접기' 만의 영역은 아니고 그 위에 '갖다 붙이기'의 작업이 들어간다. 종이를 접은 뒤 꾸미기 위해 뭘 더 많이 갖다 붙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설명해도 그래서 뭘 어떻게 판다는 것인가?라고 궁금해하시는 분들을 위해 이미 고객들 손에 가버린 작품을 몇 점 소개해볼까 한다. (미리 허락을 받은 고객의 사진만 올린다. 얼굴이나 이름을 가려 달라는 분들은 꽃으로~)
이렇게 복장뿐 아니라 이름과 날짜가 박혀 있는 맞춤 제작 주문 종이접기가 나의 밥벌이다.
어린이 전유물인 줄 알았던 종이접기로 돈벌이를 하게 될 줄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근데 이 말이 좀 웃긴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게 현실이 된 적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내 키가 157cm에서 멈출 줄은 정말이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미국이나 영국에서 살게 될 줄도 몰랐다. 주야장천 사회생활하며 유리천장을 뚫을 줄 알았지, 경력단절녀가 될 줄도 몰랐다. 그러니 종이접기 수공예 작가 같은 걸 상상했을 리는 없었다. 이제는 알 것 같다. 앞으로 벌어질 많은 일 중 대부분은 생각지도 못한 일일 가능성이 클 것이라는 것을.
어쨌거나! 아주 아주 우연히! 원래는 종이접기를 해서 팔려던 게 아니라 그저 액자에 뭘 담아서 팔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다가 아주 아주 우연히 종이접기를 떠올렸을 때 처음 그 순간에는 '과연 이게 먹힐까?' 하는 의심이 먼저 들었다. 다만 첫 시제품은 딱지 접기였기 때문에 만드는 것이 재미있고 작업이 쉬워서 그냥 올렸던 것뿐이다. 대단한 계획은 없었다.
몇 달 동안 '매출 0원'이었으나 계속 제품을 디자인하면서 어느덧 동물과 신랑, 신부의 옷도 만들게 된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인생은 우연과 우연이 겹쳐서 펼쳐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제대로 된 계획도 없이 마구잡이로 시작했던 것 같다. 마케팅도 모르고 심지어 제품의 카테고리도 엉망으로 올렸다. 특히 이 모든 걸 영어로 하려니...... 할많하않.......
그렇게 대충 시작한 것치고는 종이접기가 너무 재미있다. 고객들 사진을 보고 작게 접는 작업을 하다 보면 희열을 느낄 때도 있다. 특히 고객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재미있고 나의 작품을 받아보고 기뻐할 고객들을 생각하면 엄마미소가 저절로 나온다.
영국에서 만난 지인과는 오래전부터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자리를 잡을지, 3년 후 5년 후에는 무얼 하고 있을지 자주 상상하곤 했다. 한 분은 간호사가 되겠다고 대학에 들어갔고 나는 종이를 접기 시작했다. 그분은 대학 내내 병원으로 실습을 나가다가 이제 졸업반이 되었다. 곧 취업 준비를 할 것 같다. 그동안 나는 종이접기 작가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다시 자기만의 자리를 찾으려는 분 중 이것저것 재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확실히 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가고 싶은 길이 있어도 선뜻 발을 떼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들은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해할 수 있다. 나도 오랜 시간 갈팡질팡 휘청휘청 어영부영하며 보내기도 했으니. 하고 싶은 건 많았지만 시작이라는 문 앞에서는 늘 작아지는 나였기에, 나 또한 그랬던 것 같다.
근데 종이접기를 시작하고 이 일이 참 나답구나를 깨닫고 나자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두려워서 가지 않았던 무수한 도전 속에, 어쩌면 크게 될지도 모르는 작은 가능성의 씨앗이 숨어 있던 건 아닐까? 무심결에 놔버린 그 기회가 사실은 참 좋은 기회였던 건 아니었을까? 점쟁이도 아닌데 미래를 누가 알겠나 하는 마음이 든다. 잘될 것 같아서 시작했지만 결과는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차피 그런 것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시작해 보는 것이 시간낭비를 줄이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결혼이나 육아 등으로 사회생활을 접었다가 아이가 크고 난 뒤에 새로운 시작을 해보고는 싶은데 확신이 안 들어 망설이는 사람이 있다면 살짝 귀에 대고 속삭이고 싶다. "일단 한 발만 가보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