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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Dec 18. 2017

2017년 열일한
김지영과 민사린에게 박수를

두 딸이 살아갈 세상은 소중하니까

올해가 며칠 안 남았다. 각 분야마다 한 해를 정리하기 바쁜 때다. 올해의 책, 올해의 영화, 올해의 노래, 사건, 인물 또 뭐가 있더라? 그렇지, 조금만 있으면 방송사마다 연말 시상식도 할 것이다. 누군가 내게 2017년은 어땠냐고 묻는다면 영국 정착이 비로소 안정되어가는 해였다고 답하겠다. 온 가족 무사 무탈하게 많이 웃고 살았으니 이 정도면 만족한다. 한 개인으로는 그렇다. 그런데 사회 일원으로서의 나는 올해를 ‘김지영과 민사린의 해’였다고 붙여주고 싶다.       


김지영은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이다. 서른넷, 결혼을 했고 딸이 있는 평범한 그녀의 이야기는 소설인지 다큐멘터리인지 모를 정도로 현실적이라 많은 여성들의 공감을 얻었다. 독자들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고된 일인지 성토했고 그 안에 여전히 펼쳐져 있는 성차별적인 경험을 고백했다. 나 또한 김지영의 삶과 언뜻언뜻 겹치는 내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숨을 쉬기도 하면서 책장을 넘겼다. 인터넷서점 <예스 24>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민사린은 웹툰 <며느라기>의 주인공이다. 이제 막 결혼한 젊은 새댁이자 직장인이다. <며느라기>는 민사린이 며느리가 되면서 겪는 일화를 사실적으로 그려 큰 호응을 받고 있다. 한 남자를 사랑해서 결혼했고 직장에서는 꽤 인정받는 사원인 민사린. 하지만 그녀가 시댁에 갈 때마다 느끼는 직간접적 불평등한 상황에 독자들은 함께 화내며 주인공을 응원한다. 때론 질타하기도 한다. 왜 똑 부러지게 말을 못 하냐고. 회가 거듭될수록 남편 무구영은 독자들의 ‘공공의 적’이 되어 가고 있다. 


<82년생 김지영>과 <며느라기>에 대한 반응은 크게 넷으로 분류된다.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건 맞아 맞아 공감형. 나도 그랬다, 우리 시댁도 그렇다 등등 대다수의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담을 쏟아놓는 것이다. 두 번째는 주로 남성 독자들의 항변형 반응이다. 남자로 살기도 힘들다, 야근·회식 때문에 미쳐 돌아가시겠다, 군대는 가봤냐 등등. 셋째는 (이것도 남성 독자들의 반응인데) 깨달음형 반응이다. 여자들이 이렇게까지 힘든지 몰랐다, 이제 알았으니 잘하겠다는 반성을 담은 댓글도 있다. 마지막으로 의문형 반응이다. 요즘 시대에 저렇게까지 하려고, 나도 여잔데 우리 집은 안 그랬다 등등 소설과 웹툰이 과장된 이야기라 말한다. 


내가 주목했던 건 마지막 의문형 반응이다. 여성들 중에는 분명 김지영이나 민사린 같은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겪지 않았다고 해서 사회 전반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잘 모르는 것은 문제다. 나도 어린 시절 집에서는 한 번도 여자라 차별을 받은 적은 없었다. 엄마는 여자도 경제력을 갖춰야 하는 시대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집 밖의 상황은 달랐다. 우리 집과 친구네가 다르고, 우리 집과 학교·사회가 달랐다. 특히 직장생활을 하면서부터는 더 그랬다. 바꿔 말하면 소설과 웹툰이 과장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도 언젠가는 비슷한 순간이,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불합리한 상황 같은 게 닥칠 수도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는 현실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뭘 바꿔보고 싶어도 그게 가장 먼저니까.  


이런 의미에서 나는 김지영과 민사린이 고맙다. 여자라서 당연한 줄 알았던 일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은 게 많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서,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느끼게 해주어서, 현실을 잘 몰랐던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려주어서 고맙다. 때때로 여러 의견들은 여와 남으로 나뉘어 비판을 빙자한 비난의 화살을 들고 서로를 공격하며 격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진흙탕 싸움이 될지라도 이런 주제가 수면 위로 날아다닌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오랜 세월 관습 속에 굳게 자리 잡은 모습이 하루아침에 바뀔 일은 없으니까. 어찌 보면 우리는 다 같이 커다란 산을 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여혐이 난무하고 여성이 성적 대상화되고 독박 육아도 모자라 자식의 자식까지 봐줘야 하며 성폭력 사건은 학교, 회사 어디서나 일어나는 시대. 그때 한쪽에서는 김지영이나 민사린 같은 캐릭터들이 조용히 그들의 삶을 한 자락 보여주며 할 일을 했다. 단행본으로 등장을 마친 김지영에게는 수고 많았다고, 이제 좀 쉬라고 말해주고 싶다. 2018년에도 계속 등장할 민사린에게는 조금 더 자신을 챙기고 시댁에서 지혜롭게 대처하는 방법을 연구해 보라고, 역시 수고 많았다고 말하고 싶다. 내년엔 제2의 김지영, 제3의 민사린이 나와 열일해 주었으면 좋겠다. 내 두 딸들이 살아갈 세상이 최소 지금보다는 나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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