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글음 Feb 15. 2023

내 젊은 날의 음란마귀 이야기

<똑딱 구두>라는 영화를 보았냐고요?

20대 초반 푸릇푸릇한 대학생이었을 때 친구가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너 <똑딱 구두> 영화 봤어?" 


똑딱 구두? 영화 제목을 듣는 순간 나는 볼이 발그레해졌다. 극장에 걸린 영화는 아닌 듯하고 머릿속으로 어떤 장면이 스쳤기 때문이다. 빨간색 하이힐을 똑딱똑딱 걷는 장면. 원래 구두 신고 걷는 소리는 "또각또각"이지만 그땐 왜 "똑딱똑딱"을 하이힐이 매끈한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로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어렸을 때 동요를 잘 못 배운 게 틀림없다. 시계는 아침부터 똑딱똑딱 가는 건데.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빨간 구두를 연상하자 <똑딱 구두>는 자연스레 빨간 영화로 둔갑되었다. 아주 은밀한 영화 말이다. 그땐 한참 그럴 때였다. 남녀상열지사에 관해서라면 하나도 모르면서 관심은 저기 하늘 우주만큼 커다래서 그런 영화쯤은 거뜬히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할 때였다. 


교양으로 <여성학>을 수강한 뒤 어설프게 페미니스트를 흉내 낼 때이기도 했다. 그래서 남자들이 보는 거라면 여자들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를 펼치며 동아리 후배들을 꼬셔 한 집에 모여 중국 영화 <옥보단>을 다 같이 관람하기도 했다. (이 영화, 아시는 분들은 아시리라.)


"이건 교육용이야."라고 후배, 동기들에게 말했지만 사실은 봐도 뭐가 뭔지 몰랐다. 큰 재미도 없었지만 오로지 하나, 나도 이 영화를 봤다는 자부심(?)만큼은 대단했다. 그랬으니 <똑딱 구두>를 보았냐는 친구의 질문에 바로 예스라고 말하지 못하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친구가 물어볼 정도라면 어느 정도 화제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일 테니 봐야 할 것 같았다. 친구에게 되물었다. 


"야해?"


"음, 글쎄, 야한 장면이 있긴 할걸? 나도 아직 안 봐서 몰라."


"같이 볼래?"


"그럴까?"


"어디서 보면 될까, 너희 집 언제 비니."


야한 영화는 자고로 부모님 안 계실 때 집에서 비디오 빌려 몰래 봐야 제맛인 법이다.  


"그게 비디오로 나왔나 모르겠다. 극장에서 아직 하는 데가 있을 지도 모르니까 체크해 볼게."


"극장? 집이 나을 것 같은데. 근데 제목이 좀 웃긴다. 영화에서 구두가 중요한가 봐?"


"무슨 소리야?"


"똑딱 구두"


"응?"


"응?"


"영화제목이 <똑딱 구두>라며."


순간 내 친구의 몸통이 사라졌다. 몸을 반으로 접었기 때문이다. 


그러고서 뭐 하나 했더니 낄낄거리며 웃느라 숨을 잘 못 쉬고 있었다. 흡사 정신줄을 놓은 것 같았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얘가 왜 이러나, 미쳤나, 하고 생각했다. 근데 그 친구가 그 말을 나에게 했다. 


"흐흐흐흐흐 푸푸푸푸풉 미친!"


(사실은 이때 친구가 내뱉은 말이 정확히 "미친!" 인지, "미치겠다" 인지, "미친년" 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다른 말일 수도 있는데 25년 전 일이니 진실은 조작되었으리라. 내 친구가 미친 것처럼 웃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내 친구가 누구였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


"왜. 뭔데."


"똑딱 구두가 아니라....... 흐흐흐 풉 흐흐흐"


"얼른 말해 봐."


"그게 아니라 <투캅스 투> 봤냐고, 흐흐흐흐흐 낄낄낄."




나는 지금도 가끔 소리 내어 발음을 해 본다. 

투캅스투. 

똑딱구두. 

뚜깝꾸뚜. 

똑딱구두.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도 <생갈치 1호의 행방불명>이 될 수 있는 세상에서 <투캅스 투>가 <똑딱 구두>가 된 일쯤이야 뭔 큰 일이겠냐먀는, 혹시 이런 제목의 영화가 진짜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 인터넷에 검색을 해 본 날이 있었는데 똑딱단추가 달린 판매용 아동 구두만 잔뜩 나왔다. 사실 그때가 더 무안했다.  


내 젊은 날의 음란마귀 이야기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돌아가신 아빠를 꿈속에서 만났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