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있었던 이야기
해외에 살거나 외국여행을 하면 이 질문 많이 듣습니다.
"Where are you from?"
영어 교과서에도 나오는 기본 의문문이지요. 근데 이 질문을 집요하게 하면 인종차별이 될 수도 있어요. 며칠 전 영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어요. 故 엘리자베스 여왕의 절친이자 영국 윌리엄 왕세자의 대모인 수전 허시가 자선 행사에서 흑인 참가자에게 "진짜 어디서 왔냐?"라고 여러 번 물어본 게 문제가 되었거든요.
당연히 물어볼 수 있죠. 하지만 당사자인 풀라니가 "영국에서 태어난 영국인"이라고 대답했는데도 끈질기게, 계속해서, 물어봤다면 이야기가 달라져요.
풀라니네 부모님은 50년대에 영국으로 건너왔데요. 그녀는 이 나라에서 태어났으니 국적은 영국이지요. 그런 그녀에게 계속해서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묻는 건 "당신을 영국인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받아들여질 수 있어요.
런던에서 왔다, 런던 인근 도시 해크니 출신이다 등등을 답했지만 허시는 "그래서 너희 부모님은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서 왔냐"라고 재차 물었습니다. 부모님이 카리브해 출신이라고 말하자 그제야 "이젠 좀 말이 통한다"라고 했데요.
실제 폴라니는 이 대화에서 모욕감을 느꼈다고 해요. 마치 영국 시민권을 포기하라고 요구받는 것 같았다고 덧붙였지요. 사회적으로 문제가 커지자 결국 허시는 왕실에서 사임해야 했지요.
얼마 전 월간지 1월호에 영국 관련 시사 기사를 썼어요. 주제는 이번에 새로 뽑힌 영국 총리, 리시 수낵에 관한 거였어요. 영국 정치 이래 유색인종이 총리가 된 적은 없었기에 여러 바람을 일으켰는데요, 잡지사 쪽에서 영국의 이민자 현황을 소개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보내준 <딴지일보> 기사에는 런던 인구의 70%가 원래 영국인이 아니었다고 되어 있는 거예요. 이민자 혹은 외국인이라는 뜻이지요.
정말일까? 의문을 가지고 자료를 찾았으나 끝내 그런 통계는 발견하지 못했어요. 게다가 이민자의 정의가 정확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거든요. 풀라니처럼 부모 세대에 영국으로 온 사람은 자신을 이민자라 생각할까요? 아니면 이민자 출신? 외국인? 그러면 조부모 세대에 왔다면요?
침략과 전쟁으로 역사를 다져온 유럽은 이미 여러 나라와 인종이 섞여 버렸는데 그걸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머릿속이 복잡해졌어요.
인구조사에서 영국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묻지 않아요. 대신 스스로가 느끼는 국가 정체성(National Identity)을 질문하지요. 몇 년 전 실시했던 조사에서 저와 남편은 한국인이라 답했지만 첫째 딸은 한국인이자 영국인, 둘째 딸은 한국인이자 스코틀랜드인이라는 정체성이 있어서 그렇게 표시해서 제출했던 기억이 나요.
결국 기사에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이민 연구소의 결과를 바탕으로 런던에 33%가 영국 이외의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통계를 사용했어요. 270개의 국적이 존재하고 300개 이상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내용도 추가했고요. 런던은 뉴욕만큼이나 다양한 나라과 인종이 존재하는 도시지요?
자신과 다른 피부색의 사람이 같은 나라의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 조상이 어디서 태어났건 지금은 같은 국민이라는 것을 수전 허시는 몰랐나 봐요. 아니면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오늘날 같은 글로벌 시대에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는 고여 있는 물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흐르지 않으면 썩겠죠.
듀크대학교의 진화인류학, 신경과학과 교수인 브라이언 헤어는 자신의 저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출신이 다양한 사람들과 생각을 교류할 때 가장 혁신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어느 나라에서 왔나를 꼼꼼히 따지며 무시하거나 편을 가르기보다는 나와 다른 그들과 어떻게 힘을 합쳐 이 세상을 멋지게 만들어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더 중요하겠습니다. 동남아, 중국 등에서 유입되는 이민자가 날로 늘고 있는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