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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Nov 25. 2022

언어를 바꾸면 태도가 변한다

10년 후 안팎이면 나에게도 갱년기가 찾아올 것이다. 먼저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상상하다 보면 우울감, 상실감 같은 감정 변화가 심해진다고 해서 좀 두렵기도 하다. 요즘 갱년기의 대표적 신체 현상인 “폐경”을 “완경”으로 부르는 추세가 보인다. 1990년대 중반, 안명옥 당시 국립중앙의료원장이 처음 사용했다고 하는데 듣는 순간 나도 폐경 대신 완경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 폐경됐어. 이렇게 말하면 닫혔다는 느낌 때문에 부정적인 감정이 먼저 새겨진다. 하지만 완경했다고 하면 어쩐지 마라톤 선수가 두 손을 높이 들고 골인 지점을 통과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주변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꽃목걸이를 걸어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나는 승리의 브이를 그리며 이렇게 외칠 것이다.   

   

“월경 완주했네요. 이제 다음 단계로 갑니다!”     


“경력 단절 여성”을 “경력 보유 여성”이라고 부르자는 움직임도 있다. 앞의 단어가 경력이 단절되면서 사회에서도 차단당한 느낌이 들었다면, 뒤의 단어는 이미 보유하고 있는 경력이 있으니 다시 시작해볼 수도 있다는 긍정의 의미가 더해진다. 여성을 경력 단절당한 수동적인 입장에서 경력을 보유하는 능동적인 주체로 만들어 준 예쁜 단어다.      


앞의 예가 부정적인 의미를 긍정적으로 바꾸어냈다면 반대의 경우도 있다. 미국의 동물운동가이자 작가 겸 화가인 수나우리 테일러는 어릴 적 보았던 닭을 빽빽이 실은 트럭의 장면을 잊지 못해 화가가 된 후 그것을 그림에 담아냈다. 실제 닭 가공 공장에서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그렸는데 100마리가 넘는 닭이 깃털이 빠지고 힘 없이 쓰러져 있는 장면이다.       


그 과정에서 테일러는 닭이 모두 장애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테일러 역시 장애인이었기에 그런 프리즘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동물을 “음식”이 아니라 “억압받는 자”로 규정했다. 동물의 유전자를 변형시키고 생식기나 부리 등을 절단하는 인간의 행위를 “장애화”라고 못 박았다. 우리는 테일러의 언어 – 장애화라는 말을 들으며 인간이 생산성 향상을 위해 동물에게 행하는 일이 얼마나 잔혹한 일인지 깨닫게 된다. 그 단어 하나에 동물들의 눈물이 떠오르며 미안함이 솟아올랐다.


흔히 사피어-위프 가설로 불리는 <언어적 상대성>은 언어가 개인의 사고와 생각의 폭에 영향을 끼친다는 가설이다. 가설의 찬반 논의는 아직까지 이루어지는 중이다. 경험에 비추어 보면 같은 현상이라도 어떻게 말을 붙이느냐에 따라 관점이 달라지고 행동이 변했다. 폐경에서 완경으로, 경단녀에서 경보녀로, 식량 발전 기술에서 장애화로 글자를 대체하면서 인식이 바뀌고 태도가 바뀌었다.   

  

엎어뜨리나 매치나 현상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것을 어떤 언어로 규정하고 바라보는가에 따라 세상은 파란 하늘 아래 장밋빛이 될 수도 있고 파도치는 밤바다의 검은빛이 될 수도 있다. 개인의 삶을 위해서는 부정적인 말보다는 긍정의 언어를 쓰되, 우리가 잊지 않고 바라봐야 할 문제들은 적확한 용어를 붙여줌으로써 본질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진행하는 <칼럼으로 익히는 글쓰기의 힘> 5기 수업에서 2차 과제로 제출했던 칼럼입니다. 수업 중 다룬 칼럼과 연관된 주제로 써야 합니다. 다음 수업에서 강사님의 피드백을 받습니다. 내용을 정리하여 올리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참조해 주세요. 


<피드백>  


1) 도입부에서 대화 문장을 서술하며 경쾌하게 이어가고 있다.


2) 비문 없고 주제가 명료하게 정리되어 있다.  


3) 완경, 경력 보유 여성, 장애화 - 세 가지의 예시를 들었는데 상대적으로 두 번째인 경력 보유 여성 부분의 분량이 적다. 이왕이면 균형 있게 (한 문단을 추가하여) 잡아줘도 좋을 것 같다. 


4) 테일러의 언어 이야기가 나온 부분의 출처를 밝혀주면 좋겠다. 지난 시간에 읽은 칼럼이었으므로 칼럼니스트와 매체, 제목 등을 실어주자. 




<개인 후기>


칼럼에서 또 다른 예로 "벙어리장갑 -> 엄지 장갑"을 쓰려고 했었다. 이 말을 처음 언급했던 이는 2016년 청각장애인 어머니를 위해 장갑 이름 바꾸기 프로젝트를 열어 많은 이들의 관심을 산 바 있다. 자료를 찾던 중 2018년 그는 민주당 영입 이야기가 오고 갈 만큼 인기 있는 젊은 피였으나 그 무렵 전 여자 친구의 폭로로 미투 사건에 연루되며 지역구 출마를 선언한 지 며칠 만에 당에서 나갔다. 이후 검찰 수사를 받았다고 하는데 진실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엄지 장갑 프로젝트> 자체의 의도는 좋았으나 이를 이끌었던 사람의 도덕적 물의(일 수도 있는 일)를 알게 되자 예시로 쓰기가 꺼려졌다. 누군가는 이 글로 인해 제2의 상처를 받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업 시간에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하냐고 선생님께 여쭸다. 선생님도 생각해볼 문제라 답하시며 다른 적절한 예가 있으면 그것으로 대체하되, 반드시 그 이야기를 넣어야 할 상황이라면 넣되 결국 글을 쓴 사람이 감수해야 할 문제라 하셨다. 나만 보려고 일기장에 쓰는 글이 아니라면 책임감 있게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 수업이었다. 벌써 4주가 지나고 이제 2주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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