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말의, 양말에 의한, 양말을 위한
결심했다. 침대 아래 서랍을 꺼내 뒤집어엎었다. 양말과 팬티, 브라 등 한데 섞여 있는 속옷 뭉치에서 양말만 따로 꺼냈다. 같은 짝끼리 발목 부분을 겹치게 해 놓은 양말을 펼쳐 손으로 톡톡 쳐 구김을 없앤 뒤 반으로 접었다 폈다 하며 모두 비슷한 크기로 만들었다. 짝이 없는 것들은 침대 너머로 던져버렸다.
나머지 속옷들은 원래 서랍장에 정리해 넣어두고 침대 옆 작은 서랍장 중 맨 아래를 비워 양말만의 공간을 만들기로 했다. 노팬티존, 노브라존, 오직 양말존. 줄을 맞춰 한 켤레씩 입장시켰다. 다 해놓고 보니 반 이상이 무채색의 향연이다. 그나마 가장 부피가 큰 수면양말의 색이 인디핑크인 덕분에 칙칙함이 줄어들었다. 어찌 되었든 결과물을 보니 뿌듯함이 넘실넘실!
어디 보자, 나는 양말이 몇 켤레나 있나? 하나, 둘, 셋, 열, 스물. 겨울철에만 신는 보온양말을 포함하여 스무 켤레가 살짝 넘는다. 2-3일에 한 번은 세탁기를 돌리니까 작정하고 신지 않으면 어떤 양말은 오래도록 내 간택을 받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골고루 사랑을 나누어주리라 다짐한다.
이게 모두 구달 작가의 <아무튼 양말>이라는 책을 읽고 난 뒤 벌어진 일이다. 이 책은 양말 애호가, 양말 사랑꾼, 양말 지킴이 등 뭐라 불러도 좋을 작가 구달이 쓴 "양말에 얽힌 에세이"다. 한 꼭지만 읽어볼까 하고 가볍게 펼쳤다가 앉은자리에서 끝장을 봤다. 양말 하나 가지고 책 한 권을 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 이야기를 이렇게 찰떡같이 쫀득하게 엮어낼 수 있는 필력에 또 놀랐다. 독서의 흐름이 끊긴 건 읽다가 너무 많이 웃은 탓이다. '양말존'이라는 말도 이 책에서 처음 봤는데 표현이 신선한 나머지 내 입에 붙어 버렸다. 양말들만 모인 양말존.
책을 읽고 나면 이런 질문이 절로 떠오른다.
'나는 양말이 몇 켤레나 있을까?"
'열심히 일한 나에게 내 발에 명품 양말 하나는 끼워줘도 되지 않을까?'
'나도 양말존을 만들어 볼까?'
'다음번엔 색동이나 캐릭터 양말을 살까?'
그러니까 없는 시간 쪼개서 양말존을 만든 건 이 책을 읽고 떠오른 여러 생각 중 하나를 실천한 것뿐이다. 행동하게 만드는 책이다. 그것도 신발 신으면 잘 뵈지도 않는 양말을 매개 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