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늑대의 시간
올해 교원 빨간펜에서 내는 청소년 잡지 <위즈키즈>에 3-4개월에 한 번씩 유럽특파원으로 기사를 썼다. 내년에도 계속해달라고 하길래 계약서에 싸인을 다시 했다. 작년 이맘때쯤 브런치를 통해 제안을 받은 거였다. 오랜만에 취재하며 사회 관련 기사를 쓰다 보니 옛날 잡지 기자와 기관지 만들 때 추억이 떠올라 신나게 썼다.
포맷이 바뀔 예정이란다. 지금까지는 6페이지짜리 기획기사를 썼는데 2024년부터는 매달 1페이지씩 나간다고. 심층 분석 기사 쓰기가 더 재미있긴 한데 을의 입장에서는 갑이 해달란대로 써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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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1월호에는 얼마 전 세븐틴이 프랑스 파리에 있는 유네스코 본부에서 연설한 내용을 써달라고 했다. 일단…! 검색창을 열고 세븐틴이 무언지 검색했다. 아하, K팝 아이돌 그룹이로구나! 17명은 아니고 13명이로구나! 마감일은 지난 월요일이었고 잘 마무리하여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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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비타민하우스㈜에서 상담영양사를 하다가 적성에 안 맞아 그만두기 전, 혹시나 하는 마음을 안고 사보를 만들겠다고 기획안을 올렸을 때가 생각났다. 기획안이 통과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서점으로 달려가 <사보제작의 이론과 실제>라는 책을 구매한 일이다. 아하, 사보란 이런 것이로구나! 그 책 읽고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사보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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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다 그렇지 뭐. 먼저 저지르고 수습하면 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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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을 하다가 임시 신호에 걸려 잠시 멈췄을 때 풍경이 예뻐 사진을 찍었다. 내가 좋아하는 시간의 빛이다. 이브닝과 나이트 사이, 그 짧은 순간 어디쯤의 빛에게 자주 마음을 빼앗긴다.
앞에 쓴 글을 위의 거리풍경 사진과 함께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고등학교 국어교사인 우리 아주버님이 댓글을 달아 놓으셨다.
매직아워라고 하고
순우리말로는 이내라고도 하지요.
개와 늑대의 시간이기도 하고요.
참 분위기 있죠.
아직 어둠이라 부를 수 없는 그것이 끈적한 손길로 유혹하는 이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 있었다는 걸 알고 놀랐다. 특히 순우리말이 있다니! 사전을 찾아보니 매직아워는 "일광이 충분하면서도 인상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여명이나 황혼 시간대"라고 한다. 이내는 "해 질 무렵 멀리 보이는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이라 되어 있다. 맞다 맞아! 내가 좋아하는 시간! 그렇다면 개와 늑대의 시간은?
드라마 제목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 표현은 프랑스 속담으로 하루에 두 번, 빛과 어둠이 서로 바뀌는 즈음에 언덕 너머로 보이는 실루엣이 친근한 개인지 무서운 늑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시간을 말한다고 한다. 이야, 낭만적인 은유와 상징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자주 개와 늑대의 시간을 달려온 것 같다. 사보가 뭔지도 모르고 세븐틴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일을 벌이고 수습하면서. 그중엔 마무리 짓지 못하고 덮은 일도 수두룩하면서. 나의 결정과 행동이 나를 어디로 끌고 갈지 분간하지 못하면서. 모호한 경계와 애매함을 즐기며 때론 개와 놀고 때론 늑대에게 물리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타고난 성향이 그러하다. 특히 글쓰기와 관련된 일이라면 재거나 따지지 않고 일단 덤벼들고 볼 것 같다. 어쩌겠어. 인생 다 그렇지 뭐. 하다 망하면 망하는대로 그렇게 가는 거지 뭐. 내가 좋아하는 시간에 이름이 있다는 게 신기할 뿐이지 뭐. 개와 늑대의 시간.
아주버님, 감사해요, 한국 가면 제가 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