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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대를 잡으려다 술을 담갔네

양조 장인 되는 줄 알았네

by 영글음

옛말에 이르기를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 했다. 나는 이 말의 진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만큼 빈대는 잡기가 힘든, 사람 속을 엄청 태우는, 아주 몹쓸 놈의 요망한 생명체라는 뜻이다. 그런데 나는 빈대를 잡으려다 술을 담갔다. 왜? 초가삼간을 태우는 것보다는 술을 담그는 게 훨씬 쉬웠으니까. 어디선가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이 흐른다.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대 나의 빈대여~ ♫






빈대를 영어로 말하면 베드 버그. 외국 여행할 때 조심하라는 그 베드 버그다. 남편과 내가 그들을 처음 만난 건 14년 전 세계여행을 할 때였다. 뉴욕의 싸구려 숙소에서 한 번, 과테말라에서 산 전통 무늬 바지를 입다가 한 번. 그렇게 두 번의 만남 이후 우리는 그들을 잊었다. 가끔씩 추억을 꺼내볼 때나 아련히 떠오르는 벌레였다. 그러던 어느 날 벌레물림의 위력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으니, 우리 집에 베드 버그가 찾아온 것이었다.


영국에 온 지 1년도 안되었을 때 우리는 지인에게서 중고 2층 침대를 하나 얻었다. 그때는 가구까지 포함된 월세에 살 때였는데 우리 소유의 가구가 거의 없던 터라 준다는 사람 있을 때 얼씨구나 받았다. 짐작도 못했다. 침대와 함께 베드 버그가 이사 왔을 줄은. 몇 주 후 첫째 딸부터 시작된 베드 버그로의 헌혈활동은 온 가족이 물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처음엔 모기 같은 것에 된통 물린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 14년 전 기억이 전구 불처럼 떠오르면서 그것의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 한 번 물리면 얼마나 가렵고 괴로운지 물려보지 않은 자, 말을 말지어다! 여행하다가 물린 것도 아니고 사는 집에 생겼으니 총체적 난국이었다. 우리에게 침대를 준 사람에게 하소연을 하기도 힘들었다. 다른 곳에서 두 개를 얻어 와 일부러 하나를 건네준 것이라 베드 버그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거였다. (몇 주 뒤 어쩌다 말을 꺼냈는데 그 집도 여러 차례 물렸다더라.)


방역 업체 서너 군데를 선택해 견적을 받았다. 대략 60-70만 원쯤 나올 판이었다. 비용을 듣고 윽! 가슴을 움켜잡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며칠만이라도 우리가 직접 없애보기로 했다. 하다 안되면 바로 전화를 할 요량으로 한 손엔 가장 싼 업체의 명함을 굳게 쥐었다.


우리는 빈대 잡기 운동 본부를 꾸렸다. 우선 그들의 주요 보금자리였던 2층 침대를 버렸다. 그리고 남아 있는 침대를 일일이 분해하여 구석구석 약을 치고 매트리스를 햇볕에 말리고 고온으로 이불과 옷, 인형 빨기를 반복했다. 남편은 논문들을 찾아 빈대의 생태, 활동성 등을 연구하며 생물학도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학구열을 토해내며 빈대 박사가 되었다. 덕분에 운동 본부는 본연의 임무를 무사히 완수했지만 이 사건은 <솥뚜껑-자라> 트라우마를 남겼다. 딸 얼굴에 난 여드름마저 베드 버그 물린 거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 정도로. 어쨌든 해피엔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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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딩이었는데, 해피하고 엔딩이었는데!!!!!! 얼마 전 친구 집에서 자고 놀다 온 첫째 딸의 몸에서 두 군데 벌레 물린 자국이 발견되었다. 설마 이거 빈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남편의 말에 따르면 빈대는 알의 상태로 옷이나 가방에 붙어오기가 쉽다고 해서 상태를 예의 주시했다. 아뿔싸, 며칠 뒤 그의 다리에도 뭔가 붉은 자국이 생겼다.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빈대라 생각하자 그 붉은 자국은 그에게로 가 빈대가 되었다. 빈대 박사가 말했다.


물린 상태로 보아하니 아직 아기 같아.
빈대는 여섯 번 탈피를 해야 어른이 되고 알을 낳거든.
그러기 전에 퇴치하자!

내려앉은 심장을 가까스로 부여잡고 2기 퇴치 운동본부를 꾸렸다. 전략과 전술을 짰다. 전략은 초전박살. 전술은 굶겨 죽이기. 첫째 딸을 둘째 딸 방으로 옮기고 거기서 재웠다. 우리는 안방에서 나와 거실에 간이 매트를 깔고 잤다. 빈대는 성장 속도에 따라 몇 주간 혹은 몇 달간 사람 피를 안 빨아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아가일 것이라 믿고 그 혹은 그들을 굶겨 죽이기로 했다.


남편은 이번에도 각종 자료를 섭렵하며 공부했는데 그러던 중 논문보다 유용한 유튜브 영상을 하나 발견했다. 주제는 빈대 덫 만들기. 이 흡혈 벌레는 주로 밤에만 활동을 하는데 시력이 너무 나빠 사람이 호흡을 할 때 내는 이산화탄소로 사람에게 접근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산화탄소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배출시키고 그것을 덫으로 유인하면 잡을 수 있다는 게 설명이었다. 영상은 125만 건의 조회수를 기록했으며 2,200개가 넘는 댓글에 진짜 잡혔다는 내용이 줄을 이었다. 세상엔 빈대가 참 많은가 보구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술이 하나 추가됐다. 덫을 놓아 일찍 잡자. 온도가 40도쯤 되는 물 2리터에 설탕 두 컵, 인스턴트 이스트를 한 봉지 넣고 잘 섞었다. 그걸 빈 우유통에 넣고 빨대로 연결을 해서 미끌한 유리병으로 향하게 했다. 총 3개의 덫을 만들어 방마다 놓았다. 덫에서는 식빵 반죽 냄새가 났다. 귀를 대고 가만히 들으면 뽀글뽀글 기포가 올라오는 소리도 났다. 이스트는 설탕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며 이산화탄소를 배출했다. 빈대가 헷갈리라고 낮에도 밤처럼 암막커튼을 쳤다. 몇 날 며칠 빈대만 기다렸다. 그, 그런데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새 다 죽었나? 아니면 딸과 남편이 물린 게 빈대가 아니었던 걸까? 우리는 덫을 치우고 용기를 내어 열흘 만에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두어 달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도 물리지 않고 있으니 우리 집에 베드 버그가 없는 것은 확실했다. 천만다행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솥뚜껑을 봤던 걸지도 몰랐다. 오버를 했던 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돌다리는 두들겨 보고 건너야 했다. 빈대 물림, 그 느낌 잘 아니까. 우리 피는 소중하니까.


운동 본부의 문을 닫고 난 며칠 후 남편이 재미난 사실을 발견했다. 덫으로 만든 이스트 물이 발효가 되어 술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 잔 해보지 않겠냐며 건네주었다. 뭐시여, 시방 빈대 밥을 나한테 주는 겨? 빈대랑 독대하라는 겨? 찝찝했지만 얼떨결에 넘겨받은 빈대 덫 한 잔, 워메, 근데 왤케 맛있는 겨?


빈대 덫 술로 말하자면 향은 고소한 우유식빵이요, 맛은 청초한 막걸리 같았다. 찌꺼기를 가라앉혀 마시면 청주 맛도 났다. 인터넷으로 찾아봤더니 어떤 나라에서는 진짜로 이스트와 설탕으로 술을 담가먹기도 한단다. 이름하야 슈가 와인. 알코올 도수는 대략 15-17도 사이쯤이라고. 그랬다! 우리는 빈대를 잡으려다 술을 담근 것이었다. 빈 와인병을 가져와 담았다. 냉장고에 넣었다. 조금은 마시고 나머지는 요리 술로 쓸 생각이었다.


빈대를 잡으려다 담가버린 술, 빈 와인병에 담아 보관 중



지난 9월 어느 날 16주년 결혼기념일 이브 저녁, 빈대 덫 아니 슈가 와인을 꺼냈다. 각자의 잔에 따랐다. 이게 워낙 싸구려 술이 되놔서 한 잔 이상 마시면 머리가 아픈 게 흠이긴 하지만 하필 그날 우리 집에는 16주년을 기념할 알코올이 위스키밖에 없었다. 나는 그렇게 센 술은 즐기지 않기 때문에 슈가 와인을 마시기로 했다.


서로의 잔을 머리 위로 높이 들었다. 잔 두 개가 허공에서 부딪히며 '쨍'하고 옥구슬 소리를 냈다. 남편님아, 우리 함께 산지도 벌써 이렇게 되었구나. 빈대도 물리고 함께 잡기도 하고 참 알콩달콩 잘도 살았다.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잡... 아니, 행복하자, 건배!


이번에도 완벽한 해피엔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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